[이춘호 푸드 블로그 오너 셰프를 찾아서] 개정식당

  • 이춘호
  • |
  • 입력 2019-04-12   |  발행일 2019-04-12 제41면   |  수정 2019-04-12
46년간 대구사람 입맛 맞춘 ‘프리미엄비빔밥’…‘노소불문’ 인기
20190412
전주비빔밥과 대구식 헛제삿밥을 절충한 개정식당의 비빔밥. 단골들은 전주식과 확실히 다른 대구만의 ‘개정비빔밥’이라 부른다.
20190412
하절기를 겨냥해 북한식 함흥냉면을 개발했다. 일반 물냉면은 메밀을 사용하는데 개정은 100% 고구마전분으로 면을 만든다. 흡사 밀가루가 들어간 부산 밀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함흥식이라지만 물냉과 비냉, 회냉면 등으로 특화시켰다.
20190412
초창기부터 사용하던 전각된 간판을 대구백화점 북문점에서 현재 자리로 옮겨올 때 버리지 않고 갖고와 현관 위에 달았다. 모두에게 기품있는 프리미엄 비빔밥을 대접하고 싶다는 여망이 담겨져 있다. 개정식당 본점 전경.
20190412
24세 때 카운터 멤버로 들어와 개정식당의 2대 사장이 된 박미경씨. 그는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로 40년 이상 대구비빔밥의 자존심을 지켜온 개정의 지난 세월과 동고동락해왔다. 현재 16개의 가맹점을 관리하고 있다.

전국을 둘러보면 비빔밥은 의외로 다양한 버전이 존재한다. 사골로 밥을 짓고 황포묵, 육회, 날계란 등이 특징인 ‘전주비빔밥’,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이 들어가는 ‘진주비빔밥’, 육회가 중심 재료로 들어가는 전북 익산의 ‘황등비빔밥’, 산채가 중심이 된 ‘문경비빔밥’, 사찰밥상의 연장인 달성군의 ‘사찰비빔밥’, 멍게가 중심을 잡아주는 통영거제권의 ‘멍게비빔밥’ 등이 대표격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흐름을 잡아간 영남 사대부권에서는 특이하게 기제사 때 먹었던 음복용 ‘제삿밥’이 하나의 식문화로 엄존했다. 헛제삿밥은 제삿밥을 일상에서도 먹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다. 기제사 때만 먹던 제삿밥은 급기야 식당으로 흘러들어가 ‘헛제삿밥’이 된다. 타 도시에선 헛제삿밥 문화가 거의 포착되지 않는다. 퇴계를 상징하는 안동과 남명을 상징하는 진주권이 한국 헛제삿밥의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한말 대구도 나름 헛제삿밥의 전통을 인정받은 모양이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최영년(1859∼1935)이 지은 책 ‘해동죽지(海東竹枝)’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제사에서 음식이 남으면 비빔밥을 만들었는데, 대구부 안에서 이를 모방해 시장의 가게에서 판매하며 이름을 헛제삿밥이라고 하였다.’

헛제사밥에 전주비빔밥을 크로스오버한 대구 비빔밥의 명가가 있다. 46년 역사를 자랑하는 ‘개정식당’이다.

사대부 헛제삿밥에 전주비빔밥 절충
10가지 이상 채소·나물류 본연의 맛
고추장·날계란 배제…전주식과 구별
간이 약한 육회, 들기름보다 참기름
동성로 한복판서 26년…현판은 가보
부산 등 영남권 16개 프랜차이즈 관리

고구마 전분만 사용, 함흥냉면 특화
사골육수에 동치미 가미, 식감 돋워


◆개정식당…고급 비빔밥의 신지평

지난 8일 오후 동성로 옛 갤러리존 근처 개정식당 본점을 찾았다. ‘개정(介淨)’. 식당 상호로는 상당히 의미가 깊다. 예전 사용하던 검정 바탕의 서각 현판을 버리지 않고 26년전 이 자리로 옮겨올 때 가보처럼 갖고 와 다시 입구에 달았다. ‘정갈하고 깊은 품격을 가진 비빔밥을 추구하겠다’는 의미. 일상에서 접하는 비빔밥의 이미지와는 덜 맞는 것 같다. 투박하기만 한, 뭐랄까 그냥 거칠게 비벼놓은 서민형의 막비빔밥과 뭔가 질감이 다른, 기존에는 전혀 없었던 ‘고급 비빔밥의 신지평’을 열겠다는 경영진의 의지가 그 상호에 담겨 있었다.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1987년 24세 때 개정의 카운터로 출발해 특유의 성실함과 뚝심으로 2대 사장이 된 개정의 산증인 박미경씨(56)가 메뉴판을 내민다. 메뉴판은 지난 세월 대구의 입맛이 얼마만큼 많이 변해왔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개정비빔밥만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40년을 내내 비빔밥 하나로 우직하게 걸어왔어요. 어쩜 대구시민의 자랑이기도 하겠죠.”

60대와 20대 젊은 손님이 한 홀에 앉아 편하게 비빔밥을 먹고 있다. 본점은 패션골목의 복판에 앉아 있다. 젊은이 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소불문(老少不問)’. 다른 업소에선 참 보기 힘든 광경이다.

여기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고추장을 내지 않는다. 비빔밥 전문점으로선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고추장이 없는 비빔밥, 상당수 시민은 그걸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개정은 헛제삿밥의 전통을 더 존중한다. 제대로 된 비빔밥은 별도의 간이 필요없다. 다들 ‘묻지마 고추장’이지만 그게 과연 제대로 된 맛을 낼까. 고추장을 과도하게 넣고 비비면 10가지 이상의 채소·나물류의 고유한 향이 가려져버린다. ‘고추장비빔밥’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개정은 식재료 본연의 맛을 위해서 가급적 고추장을 넣지 말 것을 당부한다. 초창기엔 별도 용기에 고추장을 담아놓았다. 알아서 먹으라는 배려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개정만의 레시피를 지키기 위해 고추장을 없애버렸다.

개정이 고추장을 배격했다는 건 전주비빔밥과 어느 정도 이별을 시도했다고 봐야 된다. 그래서 개정은 전주비빔밥을 파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개정비빔밥’을 판다고 주장해도 되는 것이다.

◆개정비빔밥이 완성되기까지

개정식당은 78년 오픈했지만 그보다 5년 전에 대구백화점 옆에 있었던 한국투자신탁 지하 동방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전주비빔밥이란 이름으로 론칭된다. 개정이란 상호는 대구백화점 북문 앞에서 그랜드오픈할 때부터 사용한다.

개정이 대구비빔밥의 선두주자로 나타나자 시민들은 쌍수로 반겼다. 그동안 이렇다 할 만한 비빔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꽁보리밥에 열무김치와 무채, 그리고 고추장 듬뿍 떠올려주는 보리밥집형 비빔밥에 익숙해 있었다. 개정은 그걸 마이너급 비빔밥이라 치부했다. 자기만의 프리미엄 비빔밥 시대를 열고 싶어했다. 그래서 전주비빔밥을 대구에 접목시킨 것이다. 현재 대구시내의 경우 대구백화점 북문 앞, 수성못점 등 14개, 부산 2개 등 영남권에 모두 16개가 있는데 프랜차이즈 형태로 관리되고 있다.

개정의 출발은 전주비빔밥이지만 대구의 비빔밥으로 변해왔다. 유난히 무덥고 유난히 추운 ‘혹한혹서(酷寒酷暑)’의 대구 기후사정에 맞도록 전주비빔밥을 눈에 보이지 않게 현지 사정에 맞게 고쳐나갔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개정은 ‘청출어람’, 전주비빔밥과 확연히 구별되는 맛을 구축하게 된다.

개정 식구들이 어느 날 전주로 미식기행을 갔다. 전주비빔밥이 어느 정도 내공인지 현지에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유명업소의 비빔밥을 먹었는데 솔직히 그들은 그다지 감동받지 못한다. 그래서 개정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된다.

아무튼 대구 입맛에 맞게 간과 양념을 수정해나갔다. 동성로 한복판에서 비빔밥 하나로 26년간 무너지지 않고 단골을 불러모을 수 있다는 것. 업계 관계자들이 그걸 하나의 ‘성공신화’로 인정하기도 한다.

개정식당의 지난 날을 추적하다보면 대구 외식업계의 신지평을 개척해나간 오만근씨 친인척의 저력을 확인하게 된다. 81년 대구 최초의 정통 레스토랑으로 불리는 ‘아비뇽’이 중구 공평동에 등장한다. 아비뇽을 오픈한 오만근씨는 이후 ‘산마루’ 레스토랑도 오픈하는 동시에 그의 재종형이자 금은방을 운영했던 귀금속 세공전문가 오정근씨의 아내 김미영씨가 운영하는 개정을 적극 응원해준다.

전주는 고명으로 올린 날계란이 인기였는데 대구는 아니었다. 다들 계란 특유의 비린내 때문에 싫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또한 전주비빔밥의 핵심인 청포묵에 치자물을 들인 황포묵조차 맛이 없다며 버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삶은 계란이 추가되고 황포묵 대신 황색 지단을 낸다. 초창기 사용하던 놋그릇은 식기세척기 시절을 맞으면서 변질이 잘돼 결국 도자기그릇으로 변한다. 초창기에는 전문가가 와서 한달에 두 번 정도 놋그릇을 닦기도 했다. 78년부터 12년간 주요메뉴는 비빔밥, 돌솥비빔밥, 냉면, 된장·김치찌개가 전부였다. 비빔밥 한 그릇 가격은 3천500원.

개정이 등장하던 시절, 동성로 먹거리는 분식이 주도했다. 미성당, 편의방, 신춘방, 태산만두…. 또한 대구백화점 바로 옆에는 학사주점 골목이 형성된다. 그 중심부에 나타난 게 개정이다. 개정도 초창기엔 대구백화점 북문, 대구백화점 부지에 입점해 있었는데 나중에 백화점 확장 공사 때 별다른 식당이 없던 현재 패션거리 중심부로 본점을 이전한다.

젊은이의 거리답게 메뉴도 추가해야만 했다. 김치부대찌개, 해물순두부, 불낙전골, 떡국, 만두 등이 가세했다. 영업은 2003년까지 절정이었다.

32년을 개정비빔밥을 위해 헌신한 박 사장. 그의 여동생 성화씨는 경영을 맡고 있다. 두류점은 이질녀, 선스포츠점은 오빠가 맡고 있다.

개정과 지근거리에 있었던 아비뇽 레스토랑은 89년 ‘금곡삼계탕’으로 바뀐다. 개정은 금곡삼계탕도 동시에 운영하게 된다. 하지만 문을 닫고 현재 그 자리는 패션빌딩이 들어서 있다. 개정만 아직도 건재한 셈.

개정비빔밥 구성요소는 대충 이렇다. 도라지, 고사리, 표고버섯, 오이, 시금치, 양배추, 부추, 콩나물, 호박, 무생채 등을 물성에 맞게 볶고 삶아서 간을 한 뒤 밥 위에 올려준다. 전주비빔밥보다 간이 약한 육회도 한 점 올려놓는다. 산채와 달리 일반 채소류는 들기름 대신 참기름으로 맛을 낸다. 부추는 삶지 않고 무쳐낸다. 시금치와 달리 미나리는 향이 강해 사용하지 않는다. 식재료도 너무 짧게 자르면 안 된다. 10㎝의 길이를 유지해준다. 이 모두 시행착오의 결과다.

◆개정의 함흥식 냉면 이야기

비빔밥 옆에 냉면을 올려놓아야만 했다. 그래야 하절기를 견딜 수 있었다. 처음에는 메밀과 고구마전분을 5대 5, 6대 4 정도 섞은 면발을 가진 평양냉면을 팔았다. 대구는 특이하게 강원도 막국수처럼 너무 쉽게 면발이 끊겨지는 걸 싫어한다. 고무줄처럼 찔깃한 걸 좋아한다.

냉면을 위해 상권 분석을 해봤다. 대동면옥, 부산안면옥, 강산면옥, 대동강 등 대구의 공룡급 냉면이 시장을 다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틈새를 노려야만 했다. 메밀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고구마전분으로 만든 함흥냉면을 개발한 것이다. 그런데 여느 함흥냉면과 다르다. 메밀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전분만 100% 사용했다. 이게 바로 북한식이다. 참고로 북한에는 평양냉면은 있어도 함흥냉면은 없다. 함흥 지역에선 메밀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감자전분만 이용해 면을 만들어 비빔식으로 먹는다. 그 비빔냉면은 회국수, 농마면 등으로 불린다. 농마는 ‘감자전분’을 의미한다.

사출기 구멍은 1㎜. 정말 가늘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 일반 메밀냉면처럼 굵으면 너무 질겨 식감이 나지 않는다. 함흥냉면은 육수도 묵직해야 식감을 더 돋워준다. 그래서 사골육수에 동치미육수를 가미해 만든다. 그래서 그런지 먹어도 비린내가 별로 나지 않는다. 함흥식도 물냉면과 비냉식으로 먹을 수 있다. 비냉에는 인천산 홍어를 올려준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