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산청 정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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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12   |  발행일 2019-04-12 제36면   |  수정 2019-04-12
기암괴석 벼랑, 제비집처럼 앉은 전각
저 아래 지나온 시간의 굽은길이 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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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산의 8분 능선, 해발 450m의 기암괴석 사이에 자리잡은 정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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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에 들자 비천을 만난다. 에밀레종의 비천상과 꼭 닮은 날개 없는 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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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거북바위. 바위에 뿌리를 내린 참꽃이 애처롭게 피어있다.

신라 신문왕 6년인 686년, 동해에서 부처가 솟아올라 두 줄기 빛을 발했다. 빛은 허공을 가르고 날아 한 줄기는 금강산에, 한 줄기는 대성산에 다다랐다. 산청의 명산이자 진산인 대성산. 해발 600m가 조금 넘을 뿐이지만 금강산 못지않은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소금강이라 불린 산이다. 의상대사는 동해 부처의 빛 자리에 각각 절집을 세웠다. 금강산에는 원통암(圓通庵), 대성산에는 정취암(淨趣庵)이다. 정취란, 깨끗함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은 대성산의 8분 능선, 해발 450m 즈음의 기암괴석 사이에 새봄의 제비집처럼 얹혀 있다.

대성산 8분능선 해발 450m 자리 여섯개의 전각
조선 효종 4년 화재로 전소 … 이듬해 새로 모셔
묵묵히 정진하는‘무이행’ 극락 가는 가장 빠른길
치성 드리면 가정이 화목하고 번영 ‘쌍거북바위’
모여 앉은 집들, 파편과 같은 봄날의 들판에 뭉클

◆정취암 가는 길

잘 닦인 아스팔트길이 휘영휘영 산을 오른다. 머리를 조아리고 한발 한발 신중히 디뎌 고른 듯한 꼬부랑길이다. 정취암 등산로라는 표지를 천천히 스친다. 수목이 궁륭을 이룬 좁은 길 안을 슬쩍 들여다본다. 벽처럼 치고 오르는 산길이다. 의상의 시대 이후 아주 오랫동안 정취암으로 향하는 몸들은 아주 고단했겠다. 도로가 닦인 지는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갑자기 평지에 내려선 듯한 곧은길과 함께 ‘둔철 생태 체험숲’이 펼쳐지고 그 옆에 정취암 표지석이 놓여 있다. 꾸준히 오르던 길이 예서부터 조심스레 내려간다.

주차장이 꽤 널찍하다. 산자락에는 근래에 조성한 듯한 부도가 있다. 미래를 위해 터는 넉넉히 다져 놓았다. 가속도가 붙은 내리막에 정취암 표지판과 함께 두 개의 기둥이 나타난다. 기둥 위에는 연꽃 대좌에 앙증맞은 발을 가지런히 놓은 사자상이 앉아 있고, 기둥의 가슴에는 각각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라 새겨져 있다. ‘이 문에 들어오면서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셈을 해 보면 기둥은 지붕 없는 일주문이다.

피안으로 들자마자 비천을 만난다. 에밀레종의 비천상과 꼭 닮은 날개 없는 천사가 삼각의 바위에 돋을새김 되어 있다. 매화나무 한 그루가 비천의 머리 위에 꽃핀 가지를 드리운다. 대성산에서 처음 본 꽃이다. 길 가 경계석에 노랗고 반들거리는 딱지가 듬성듬성 붙어 있다. 아마 한밤이면 별처럼 빛나 나침반 없는 순례자를 인도할 것이다. 바람은 아주 약하지만 대기는 무척 차가워 조금 두통이 인다. 산의 기운인가, 더딘 봄 때문인가. 내일이면 아플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밀려온다.

◆정취, 극락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

새소리도 없이 긴장감이 도는 정적을 깨며 단말마와 같은 풍경소리가 들린다. 이내 모퉁이 너머로 벼랑에 기대 조밀하게 앉은 여섯 개의 전각이 단번에 모습을 드러낸다. 고조된 환호성처럼 눈이 번쩍 뜨인다.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산들의 물결이 밀려온다. 저 아래에는 지나온 시간의 굽은 길이 선명하다.

전면의 가운데에 정취암의 큰 법당인 원통보전이 위치한다. 그 왼쪽에는 종무소가, 그 오른쪽에는 선방이 협시하고 있다. 정취암의 주불은 정취보살(正趣菩薩)이다. 그 시작은 신라 헌강왕 때인 858년 범일스님이 낙산사에 정취보살상을 봉안하면서부터다. 이후 고려 고종 때인 1254년 몽고의 침략으로 보살상은 땅속으로 피신되었고 난이 지나간 후에는 왕명을 받아 궁궐의 창고에 모시게 된다. 그로부터 100년 후, 공민왕 3년인 1354년에 궁궐에 있던 정취보살상이 이곳 정취암에 봉안되었다. 정취암은 고려 말 공민왕의 개혁의지를 실현하고 원나라와 명나라의 간섭을 극복하려는 개혁세력의 주요 거점이었다. 정취암은 조선 효종 4년에 화재로 전소되었다. 현재 정취암의 정취보살상은 그 이듬해인 1654년에 새로 모신 것이다.

정취(正趣)는 곧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암자의 정취(淨趣)와는 한자가 다르지만 깨끗함과 바름은 한 가지가 아니겠나. 정취보살은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간다고 해서 ‘무이행(無異行)’을 실천하는 보살이라고도 한다. 그는 오로지 용맹 정진하여 물러서지 않는다. 한눈팔지 않고 목표를 향해 꾸준히 힘차게 걸어간다. 그의 광명 앞에서는 그 어떤 광명도 빛을 내지 못한다. 그의 광명은 고통받는 이들을 비추어 그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비장하면서도 장엄한 광명이다. 그래서 정취보살의 무이행은 극락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극락을 꿈꾸는 곳

원통보전과 선방 사이에 쌍거북바위가 높다랗다. 치성을 드리면 부부의 금실이 좋아지고, 자손이 없는 집안에 자손이 생기고, 가정은 화목해지고 사업도 잘 된단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참꽃이 애처롭게 피어있다. 대성산에서 본 두 번째 꽃이다. 원통보전 뒤쪽 돌계단 위에는 큰 유리창을 가진 한 칸 전각이 있다. 지난해 즈음 조성한 정취전이다. 정취암이 기대고 있는 대성산 바위를 3면으로 감싸고 그 앞에 불단을 마련한 특이한 모습이다. 전각은 저보다 오래 그곳에 살아온 소나무를 베지 않고 터를 잡았지만 나무는 푸른빛을 잃었다. 정취전의 왼쪽에는 응진전, 오른쪽에는 삼성각이 자리한다. 삼성각의 뒤쪽 세심대라 새겨진 바위 아래에 호랑이를 탄 산신상이 있다. 그 옆에는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호랑이에 올라탄 산신을 협시동자가 받들고 있는 모습이다. 전각 안에 들어가면 유리창을 통해 산신을 볼 수 있다.

응진전 뒤쪽 암봉에 멋진 전망대가 있다고 한다. 너럭바위와 소나무 한 그루와 돌탑이 있는 벼랑이라 했다. 몇 걸음 산길을 오르다 세속적인 불안에 떠밀려 돌아섰다. 지금은 조금 후회스럽다. 그러나 정취암 어느 곳에서든 산청의 산하는 장쾌하다. 모여 앉은 집들과 파편과 같은 봄날의 들판이 뭉클하고 이제 가야 할 시간의 굽은 길이 멀지 않다. 정취를 만나 극락을 꿈꿔 본다. 동시에 나락도 느껴본다. 성철 스님이 이곳에 머물렀었다 한다. 만난 적 없는 이 친숙한 이름이 극락을 꿈꾸게 한다. 다시, 대성산의 굽이진 길을 내려가다 문득 저 산 위에 제비집처럼 앉은 정취암을 본다. 산정의 너머로부터 창공이, 그 영원한 하늘이 들어오고 있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광주대구고속도로 광주방향으로 가다 함양 분기점에서 35번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 통영방향으로 간다. 산청IC로 나가 60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보면 오른쪽에 정취암 표지석이 커다랗게 서 있고 대성산 산길이 시작된다. 꼬부랑길을 조금 오르다 보면 정취암을 약 2.5㎞ 앞둔 지점에 정취암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도보로는 800m 거리다. 둔철 생태 체험숲 옆으로 내려가면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정취암까지는 느린 걸음으로 10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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