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반복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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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24 08:18  |  수정 2019-01-24 08:18  |  발행일 2019-01-24 제23면
[문화산책] 반복의 미학
정은신<작곡가>

오랜만에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내림 나장조를 듣는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그 멜로디는 다시 반복된다. 그러다가 변화를 맞이하고 새로운 색깔로 바뀌면서 점점 강해진다. 이번에는 그 멜로디가 힘찬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역시 슈베르트다. 시작한 지 몇 분이 채 되기도 전에 사람의 마음을 일렁거리게 하는 재주를 지녔다. 음악 역사에서 슈베르트만큼 반복의 의미를 아름답게 사용한 작곡가가 또 있을까.

음악은 예술에서 가장 추상적인 장르다. 그래서 음악 작품 안에는 반복이 많다. 추상적이고 다소 막연한 음악을 청중에게 전달하려면 그것을 각인시키는 장치가 필요한데, 반복은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천재 작곡가인 모차르트도 결국에는 주제를 반복하면서 음악을 마무리한다. 베토벤의 그 유명한 제5번 교향곡 ‘운명’은 주제의 집요한 반복을 통해 곡 전체의 통일성을 획득한다. 녹음이나 재생 기술이 없었던 그 옛날, 작곡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처음 듣는 청중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면서 반복에 반복을 더했다.

20세기 작곡가들은 선배 작곡가들이 수백년 동안 해왔던 주제 반복을 구시대의 유물로 생각하고 기피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멜로디와 화성 및 구성방법을 통해 음악은 유럽에서 점점 더 낯설고 난해한 장르가 되어갔다. 현대음악을 전공한 나에게도 ‘반복’이란 늘 고민스러운 화두였다.

독일 유학시절 나를 지도했던 마이어 교수와의 레슨 시간에 이런 고충을 이야기했다. 이 부분에서 반복을 하고 싶은데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마이어 교수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아침과 밤을 맞이한다. 사계절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일상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이지 그것이 반복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이때부터 반복에 대한 나의 고민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반복이 필요한 부분에서 나는 과감하게 반복을 사용했다. 그러나 각각의 반복이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느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앞뒤의 상관관계, 즉 맥락에 따라 같은 부분도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타국에 살면서 공부가 힘에 부칠 때마다 나는 마이어 교수의 가르침을 생각했다. 지칠 때는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평온함을 즐기면서 그 안의 소소한 변화를 발견했다. 반복은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힘을 비축하는 시간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맞이한 소중한 순간을 반갑게 만끽하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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