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은 공공미술로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 최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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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19   |  발행일 2019-01-19 제16면   |  수정 2019-01-19
“좋은 기념공간은 의미와 장소 조화 이뤄
현란한 도시일수록 단순하고 여유로워야”
정부나 지자체의 일방적 프로젝트 아닌
여론형성 과정 거쳐 제작한 점도 ‘눈길’
베를린은 공공미술로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피터 아이젠먼이 설계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 <반비 제공>
베를린은 공공미술로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백종옥 지음/ 반비/ 240쪽/ 1만8천원

우리나라에서 무언가를 기억하는 기념비는 늘 비슷한 형태로 존재한다. 대구 두류공원에 조성된 2·28 민주의거 기념탑이나 앞산 충혼탑은 미묘한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하늘을 향해 높게 솟아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이렇듯 한국에서 우리 역사의 기억을 되돌아보고 기념하는 방식은 단순했다. 그저 관련 문구가 새겨진 조각, 탑이면 충분했다. 다만 최근에는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모임의 힘으로 ‘4·16 기억 저장소’를 만들게 됐고, ‘4·16 기억교실’이 조성되기도 했다.

조형예술을 공부하고 미술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공공미술에 주목했다. 그는 특히 독일의 수도이자 도시 전체가 기념공간이라 할 수 있는 베를린의 경우, 2000년대 초부터 계속 탐구해왔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베를린 기념 조형물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을 발견한다. 대부분 역사적인 기억을 담고 있는 장소와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변의 환경과 이질감도 전혀 없다. 저자는 “이제 기념 조형물은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장소에 설치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예술적으로 형상화되었을 때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라며 “이렇게 장소의 맥락과 의미가 적합하게 설치된 기념 조형물의 좋은 사례를 만날 수 있는 도시가 바로 베를린”이라고 말했다.

책은 좋은 기념조형물의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나라에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가 소개하는 베를린의 기념조형물 10곳은 거창한 공간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베를린에서 기념조형물이 조성된 방식은 ‘도시의 피부에 스며드는’ 형태다.

노이바이헤는 기존의 공간을 과거의 기억을 담는 곳으로 변모시킨 사례다. 100여년간 왕의 경비소였던 노이바이헤는 왕의 경비소, 나치가 병사들의 죽음을 찬미하는 장소 등으로 쓰였다. 그러다 독일 재통일 후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들을 위한 중앙 추모소가 되었다. 그 안의 텅빈 공간에는 케테 콜비츠가 만든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청동조각복제품이 설치되어 있다. 저자는 노이바이헤를 건축물과 미술작품이 잘 조화된 기념조형물로 평가했다.

베벨광장 중앙에 설치된 미하 울만의 ‘도서관’은 언뜻 보면 기념조형물인지 알아채기 어려운 형태다. 가로 120㎝, 세로 120㎝ 크기의 정사각형 투명 유리창 아래로 텅빈 직방체 공간이 있다. 1933년 유대인 작가와 나치를 비판한 비유대인 저자들의 책까지 모조리 불태웠던 화형식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는 9·11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 조형물인 뉴욕의 ‘9·11 추모비’와 ‘도서관’을 함께 언급하며 이 두 조형물이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소란하고 현란한 도시일수록 명상적인 공백과 여백이 사람들에게 감성적인 울림을 줄 수 있다. 이런 접근방식은 한국의 대도시에 적용할 만하다”라고 제안한다.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건물이 없는 곳에는 주차장이 만들어져 자동차들이 들어서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관조의 틈새’를 틔워주려면 공공성이 강한 장소를 단순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베를린의 기념조형물은 누구나 편하게 올 수 있는 기념 공간이기도 하다. 홀로코스트를 기리는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는 서로 다른 높이의 콘크리트 블록 2천711개가 숲을 이루고 있다. 블록에는 안타까운 죽음이 담겨 있지만 이 공간은 누구나 쉽게 돌아다닐 수 있고 블록 위에 앉아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공원의 형태에 가깝다.

특히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곳 중 눈에 띄는 공간들은 일상의 공간에 어색하지 않게 들어서 있다. 버스정류장에 관련 사진, 설명문을 붙여 조성한 로니 골츠의 ‘아이히만의 유대인 담당 부서’는 붙여져 있는 사진 속 남성이 나치 집권 시기 유대인 말살 업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한 공무원인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평범한 버스 정류장이지만 아이히만의 범죄 행위를 상기시키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책에서 소개하는 베를린의 기념 조형물 사례를 보며 우리가 곱씹어 볼 만한 점은 정부나 지자체가 일방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념 조형물 설치 논의부터 공모, 제작까지 여론 형성 과정이 있었다. 7년의 시간이 걸린 홀로코스트 추모비의 제작과정이 대표적인 사례다. 시민운동으로 설치 여론을 모아 공모를 두번이나 진행했고, 반대 의견도 수렴해 설계안에 지하의 정보관을 추가했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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