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품위 있는 직업인, 품위 있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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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5   |  발행일 2018-12-15 제23면   |  수정 2018-12-15
[토요단상] 품위 있는 직업인, 품위 있는 인간
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일본 출신 영국인 소설가로 201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송은경 옮김, 민음사, 2009)은 멋진 작품이다. 다 읽은 뒤 책을 덮고 그 의미를 음미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해 준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영국 대저택의 집사인 주인공 스티븐스의 회상과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품위 있는 집사’의 면모나 자격에 대한 그의 장광설은 자신의 직업에 긍지를 갖고 최선을 다하는 인물의 삶을 보여 준다. 부친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이성의 사랑을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그는 한평생에 걸쳐 자기 직무를 완전무결하게 해내는 데 최선을 다해 왔다. 스티븐스의 이러한 삶은 두 가지 동인을 갖는다. 자신이 평생을 모셨던 ‘훌륭한 신사’인 달링턴 경에 대한 충성이 외적인 요인이라면, 품위를 갖춘 위대한 집사가 되려는 욕망이 내적인 요인이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된 상태에서 그는, 달링턴 경은 인생의 막판에 실수를 범하긴 했어도 여전히 훌륭한 신사이며, 그와 더불어 자신이 보낸 시기야말로 위대한 집사로서 누린 인생의 전성기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남아 있는 나날’이 큰 울림을 주는 것은, 주인공 스티븐스의 주장과는 달리 그의 행적과 생각이 대단히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의 에피소드와 현재의 여정에서 확인된다. 주인공의 회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달링턴 경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취했던 노력들이란 것이 나치주의적인 행위였음을 알게 된다. 물론 스티븐스는 이러한 생각을 근거 없는 비난이라고 부정하지만, 그러한 부정 자체가 또 다른 회상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총무 켄턴 양과의 업무관계에 대한 회상 속에서 드러나는 그녀와의 갈등, 곧 달링턴 경의 명령대로 유대인 하녀 둘을 해고하면서 생겼던 갈등이 진실을 알려준다. 스티븐스가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친 달링턴 경이 히틀러 추종자였다는 사실은, 스티븐스가 새로운 주인인 패러데이와 나누는 몇 차례 대화나 여행 중에 만나게 되는 인물들과의 대화 장면에서 그가 말을 멈추거나 자리를 피하는 것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요컨대 주인공 스티븐스는 자신이 모셨던 달링턴 경이 평화를 위해 노력한 훌륭한 신사라는 생각을 신념처럼 갖고 그를 위해 한평생을 바친 자신의 삶 또한 바로 그를 모셨기 때문에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는 주장을 계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달링턴이 나치주의자였다는 사실과 스티븐스야말로 스스로를 자신의 업무 범위 안에 가두고 그 이상의 일은 전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똘똘 뭉친 맹목적인 인간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주인공 자신은 모르는 채로 진실이 밝혀지는 이러한 극적 아이러니가 잘 구현되어 있다는 점이야말로 ‘남아 있는 나날’이 소설로서 이룩한 미학적인 장점이다. 물론 이 작품의 의의는 형식적인 데 그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과제를 잘 해결해 내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온 스티븐스의 삶은 도구적 합리성에 빠져 있는 기능인의 전형에 해당한다. 자신이 받은 명령의 정당성은 따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것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방법만 찾는 정신이 도구적 합리성이다. 그러한 합리성의 실현이 악을 행하는 것이라 해도,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묵묵히 일을 해내는 것이 기능인이다. 로봇과도 같은 스티븐스의 이러한 모습을 여실하게 그렸다는 데서 이 소설은,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실무 책임자였으면서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강변한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밝힌 한나 아렌트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문학적 버전이라 할 만한 의의를 갖는다. 소설 뒷부분에 이르기까지는 주인공의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는 점에서 ‘남아 있는 나날’은, 우리 안의 아이히만을 발견하는 놀라움과 ‘품위 있는 직업인’이 아니라 ‘품위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까지 선사한다.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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