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영주 소수서원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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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07   |  발행일 2018-12-07 제36면   |  수정 2018-12-07
글공부 지친 유생들이 머리 식히며 바라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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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천과 취한대. 단종 복위운동 때 몰살된 순흥 사람들이 죽계천에 수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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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수림 너머 소수서원이 펼쳐진다. 가운데가 500년 은행나무, 오른쪽이 경렴정, 왼쪽이 서원의 정문인 지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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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의 강당인 명륜당. 내부에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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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촌. 영주 지역의 오래된 집들을 복원한 선비문화 체험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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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돌탑.


지난밤 눈이 왔던 모양이다. 말끔한 도로의 가장자리, 둔덕의 응달진 곳마다 흰 눈이 쌓여 있다. 영주 풍기읍의 외곽을 지나 곧 순흥면(順興面)으로 들어선다. 고려 충목왕의 태를 안치하고 순흥이라 이름 붙였다는 땅. 면의 남쪽으로는 죽계천(竹溪川)이 흐른다. 스산한 도로변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으며 쓰레기를 줍고 있다. 주울 것 없는 단조로운 걸음이 마치 순례 같다. 조선 세조 3년인 1457년 이곳에서 단종 복위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순흥은 전소되었고 고을 사람들은 몰살되었다. 시신은 죽계천에 수장됐다. 이후 1541년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로 부임한다. 

서원 가는길 500년 적송 학교숲 조성
퇴계가 터 닦고 소나무 심은 취한대
단종 복위운동 순흥 주민 죽계천 수장
명종친필‘소수서원’편액 걸린 명륜당
대체로 작고 자유롭게 놓여진 건축물
유생 4300여명 거쳐가며 글공부 매진


◆학교 숲, 학자수림

풍기군수 주세붕은 고려 말의 학자 회헌(晦軒) 안향(安珦)이 어린 시절 노닐며 공부했다는 순흥의 내죽리(內竹里) 죽계천변을 찾았다. 안향은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학자다. 그는 송나라 주자(朱子)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해 회헌이라 자호할 만큼 주자를 흠모했던 인물이었다. 주세붕은 안향이 노닐던 땅에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다. 조선 중종 38년인 1543년의 일이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소나무 숲이다. 수령 300년에서 500년에 이른다는 적송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우아한 경건이다. 서원 건립 초기에 1천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는데 500그루가 살아남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른바 학교 숲을 조성한 것이다. 소나무는 처음 식재될 때부터 ‘학자수(學者樹)’라고 불렸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로 ‘세한송(歲寒松)’이라고도 하였다.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은 순흥에서의 유배시절 이곳의 학자수를 그려 친우인 추사 김정희에게 보냈다. 그것은 이후 추사가 그린 ‘세한도’의 토대가 되었다. 바늘처럼 가느다란 솔잎에 쌓였던 눈들이 녹아 아슬아슬 솔잎 위에 맺혀 있다가 느끼지 못할 미풍에도 후두둑 쏟아져 내린다. 솔내 나는 이슬비 같은 눈, 정수리에서부터 찬 기운이 흘러내려 뒷목이 서늘해진다.

주세붕의 뒤를 이어 1548년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나라에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한다. 이에 명종은 1550년 대제학 신광한에게 명하여 이름을 짓게 하고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했다. ‘천명을 받아 잇는다’는 소(紹)와 ‘스스로 인격을 다듬는다’는 수(修)다. 솔숲의 가장자리에 죽계천의 수증기를 등에 업은 당간지주가 서있다. 옛날 이곳에는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었다 한다.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며 보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리학이 지배이념인 시대라 할지라도 불교의 상징물을 깨부수지는 않았다. 죽계천이 내려다보인다. 눈부시다.

◆소수서원

죽계천변에 정자 하나가 있다. 퇴계가 송백과 죽을 심고 ‘취한대(翠寒臺)’라 불렀다는 곳이다. 그 옆으로 무시무시한 물빛과 마주한 ‘경자바위(敬字岩)’가 보인다. 붉은 ‘경’자는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쓴 글씨다. 그 위의 ‘백운동’ 석자는 퇴계가 음각한 것이라 한다. ‘경’은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이다. 일설에는 죽계천에 수장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경’자를 새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곧장 천변으로 내려가고 싶지만 부리부리한 눈빛의 은행나무가 대단한 기세로 몸을 잡아끈다. 수령 500년이라는 은행나무는 신의 현현이라 할 만한 모습이다. 그 뒤쪽의 낮은 둔덕은 소혼대(消魂臺)라 부른다. 글공부에 지친 유생들이 머리를 식히던 쉼터였다 한다.

서원 정문 앞 왼쪽에 성생단(省牲壇)이 있다.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지낼 때 소용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단이다. 오른쪽에는 또 한 그루의 오래된 은행나무와 1543년 주세붕이 세웠다는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경렴은 염계 주돈이의 호를 딴 것으로 학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다. 현판은 초서의 대가 고산 황기로의 글씨로 그는 스승인 퇴계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글씨를 썼다고 전해진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백운동(白雲洞)’ 현판이 걸린 명륜당의 측면과 마주하게 된다. 강당 안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강당 왼쪽에 안향 등을 모신 사당이 있고 그 뒤로 장서각(藏書閣)과 전사청(典祀廳)이 자리한다. 강당의 뒤편 왼쪽에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 오른쪽에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위치한다. 건물들은 매우 작다. 그리고 자유롭게 놓여 있다. 아직 조선 성리학이 딱딱해지기 전이고 서원건축의 전형이 확립되기 전의 모습이다. 이곳에 4천300여 명의 유생들이 거쳐 갔다. 가장 안쪽에는 근래에 세워진 사료관과 충효교육관이 있다. 사료관 옆 후문으로 나가면 서원 아래 커다란 연못이 펼쳐진다. 추위에 놀라 얼어붙은 연잎들과 백발이 된 풀들이 허리를 굽히고 있다. 작은 서원이 예서는 커 보인다.

◆선비촌과 죽계천

서원 뒤편의 소나무 숲 너머에는 선비촌이 있다. 2004년에 조성된 선비문화 체험의 장이다. 언뜻 세트장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선비촌에는 영주사람들의 한이 스미어 있다고 한다. 단종 복위운동으로 재가 되었던 순흥은 원래 고래등같은 집들이 즐비하고 밤낮으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고을이다. 순흥은 숙종 때 겨우 명예를 회복했지만 옛 모습은 회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초 일제에 의해 다시 한 번 전소되고 만다. 지금 선비촌에는 영주 지역의 오래된 집들이 복원되어 있다. 수백 년 이어진 뼈아픈 회한을 이렇게 치유한 것이다. 오늘 눈 녹아 질척이는 선비촌 고샅길에 수녀님 세 분의 웃음소리가 높다.

죽계천 백운교를 건너 천변을 걷는다. 그늘진 길에 눈이 희다. 누군가 ‘경자바위’ 곁에 눈사람을 세워 놓았다. 눈사람 머리 너머로 서원의 긴 담장과 경렴정이 올려다 보인다. 조금 더 가면 취한대의 옆모습과 마주한다. 퇴계가 터를 닦고 흙을 쌓아 소나무를 심었다는 곳이다. 정자는 1986년에 건립한 것이다. 정자의 오른쪽 숲속에는 금줄을 두른 돌탑이 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매년 정월 대보름마다 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고 한다. 징검다리를 건너며 죽계천을 바라본다. 천은 소백산 비로봉에서 발원해 순흥을 휘감고는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고려 후기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죽계별곡’은 오늘도 흐르고, 수장된 사람들의 피는 냇물과 함께 10여리를 흘러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 ‘피끝마을’에서 멈추었다. 죽계천 모래톱 위에 쌓인 흰 눈이 햇살에 반짝인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55번 중앙고속도로 풍기IC에서 내린 후 우회전해 931번 지방도로를 따라 줄곧 직진하면 된다. 서원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연중무휴이며 관람시간은 겨울철(11월부터 2월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관람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할 수 있다. 입장료는 소수서원과 선비촌 통합 가격으로 어른 3천원, 청소년과 군인 2천원, 어린이 1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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