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8] 최치원의 聖地<4·끝>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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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29   |  발행일 2018-11-29 제14면   |  수정 2021-06-22 17:47
지증대사 죽음을 추모하며 스스로의 글재주를 부끄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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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희양산 봉암사 산문을 나서 계곡 아래로 내려서면 흰 시루떡 같은 너럭바위에 ‘야유암(夜遊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최치원이 남긴 글인 야유는 ‘시를 읊으며 밤을 즐긴다’는 뜻이다. 야유암 뒤편 멀리 희양산 봉우리가 정면으로 보인다.

 

언제나 흠칫 놀란다. 희양산(曦陽山) 하얀 봉우리. 냇물 따라 저 놀라운 산으로 드는 길, 봉우리는 이따금 모습을 감춘다. 고운 냇물과 소박한 마을에도 눈길 주라는 듯. 그러나 마음은 자꾸만 산마루를 더듬는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1천100여 년 전 지증대사가 처음 희양산을 만났을 때를 이렇게 전한다. 

 

‘산이 신령하여 갑옷 입은 기사를 앞세운 듯한 기이한 형상이 있어…산이 병풍처럼 사방을 에워싸고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에 치켜든 듯하고, 물이 백 겹으로 띠를 두른 듯하여 용의 허리가 돌에 누워 있는 듯하였다…하늘이 준 땅이니 승려의 거처가 되지 못한다면 도적의 소굴이 되리라.’ 

 

곧 지증대사는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 희양산 남쪽 자락에 터를 잡는다. ‘기와 올린 처마를 네 기둥에 일으켜 지세를 진압하고, 쇠로 만든 불상 둘을 주조하여 절을 호위케 했으니’, 바로 봉암사(鳳巖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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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로 지증대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그의 행적과 죽음,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불교계의 상황까지 광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1. 지증대사 적조탑비 

 

태고의 모습으로 엎드린 산길이 너른 계곡과 함께 나아간다. 걸음은 물소리에 묻혀 둥둥 선계(仙界)를 떠도는 듯하다. 봉암사는 지증대사가 창건한 이래 지금까지 선(禪)을 수행하는 도량(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이다. 특히 1982년 조계종의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되면서 일반인의 접근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1년 중 단 하루 오직 석가탄신일에만 굳게 닫힌 산문의 빗장을 연다. 평소의 봉암사 길은 신경을 타고 흐르는 자연의 미세한 소리에도 꿈쩍 않는 적막이다.

일주문을 만난다. ‘희양산봉암사’ 현판이 걸려 있다. 본 적 없는 기둥 받침이 특이하다. 일주문은 봉암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적어도 18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다시 한 번 문을 연다. 그리고 천천히, 계류 너머 봉암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계곡물 위에 베개처럼 걸린 침류교(枕流橋)를 건너 압도적인 규모의 남훈루(南薰樓)를 지나면 봉암사가 환하게 펼쳐진다.

대사의 어린 시절·높은 행적·죽음
당시 불교상황 등 광대한 내용담아
 

 

봉암사는 후삼국시대의 전란과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고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 현재의 전각들은 대부분 근래의 것이다. 지증대사가 맨 처음 터를 잡은 자리에 봉암사의 중심전각인 대웅보전이 자리한다. 1922년에 세운 것이다. 앞에는 두 동의 요사채가 보림당(寶林堂)과 성적당(惺寂堂)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대웅보전 우측에 있는 극락전은 봉암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물 제1574호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정중앙의 한 칸 내실을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방형의 사모지붕이 두 겹으로 올라 있고 탑의 상륜부처럼 절병이 얹어져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후백제 견훤을 피해 이곳에 숨어들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는 왜군들이 불타는 장작을 극락전 지붕 위로 던졌으나 장작개비만 탔다고 전해진다.


대웅보전 좌측에는 금색전(金色殿)이 자리한다. 금색인(金色人), 즉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이다. 금색전은 원래 봉암사의 대웅전이었다. 지금도 금색전 배면에는 대웅전 현판이 걸려 있다.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금색전은 옆으로 옮겨졌다. 해체하여 조립한 것이 아니라 통째로 들어 옮겼다 한다. 금색전 앞에는 보물 제169호인 삼층석탑이 서있다. 머리장식이 모두 완전히 남아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금색전 뒤편에 커다란 비각이 있다. 고운의 사산비명 중 하나인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지증대사의 사리탑(보물 제137호)을 모신 곳이다.

지증대사는 헌강왕 8년인 882년에 입적했다. 고운의 글에 따르면 ‘12월18일 가부좌를 하고 말을 나누던 중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승려가 된 지 43년이요, 누린 나이는 59년’이었다. 왕은 ‘지증(智證)’이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명을 내리고 885년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비문은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른 뒤 진성여왕 8년인 893년에서야 완성되었고 탑비는 30여 년이 더 지난 경애왕 원년인 924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에는 지증대사의 모습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그의 높은 행적들과 죽음,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불교계의 상황까지 광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지금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국보 제315호다. 고운은 지증대사의 죽음을 추모하며 이렇게 썼다. ‘썩은 선비의 붓으로 대사의 정상(情狀) 들추기 부끄럽구나. 발자취 빛나 탑에 이름 새길 만한데 재주가 모자라 글짓기 어렵기만 하네. 선열(禪悅)에 흠뻑 취하려거든 이 산중에 와 탑의 비명(碑銘) 보기 바라네.’ 청석(靑石)의 비신에 새겨진 고운의 글은 많이 희미해졌다.

봉암사의 가장 깊은 자리에 스님들의 수행처인 태고선원(太古禪院)이 자리한다. 1947년, 광복 직후의 극심한 혼란기에 성철 스님과 청담·자운·우봉 스님 등 네 분이 이곳에 모였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운다. 이른바 ‘봉암사 결사’다. 이후 청담·행곡·월산·종수·보경 등 20여 명의 스님이 결사에 동참했고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수행의 근간을 확립하게 된다. 이것이 봉암사가 엄격한 수행 도량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게 된 시초다. 입구는 진공문(眞空門)이다.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안에 들어오면 세상에서 알았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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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 봉암사 침류교를 건너 ‘마애불참배길’을 따라가면 거대한 반석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큼직한 바위들이 기립해 있다. 그중 한 바위에 ‘백운대(白雲臺)’라 새겨져 있는데 최치원의 글씨라 전해진다.

#2. 백운대와 야유암

 

다시 침류교를 건너 ‘마애불참배길’이라 적힌 소롯길로 들어선다. 숲은 깊고 그윽하고 계곡 길은 더없이 아름답다. 이곳에는 수달, 하늘다람쥐, 담비, 삵을 비롯한 주요 멸종위기종이 광범위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봉암사 일대의 사찰림은 국가 산림유전자원보전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세속의 간섭 없이 영구히 참선 도량으로 가꿔가기 위한 봉암사 측의 건의였다. 일체의 개발행위는 물론 실질적인 사유권 행사를 거의 포기한 것이다. 거대한 반석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큰 바위 문을 지나면 하늘처럼 넓은 반석 가에 하늘을 이고 앉은 마애보살을 만난다. 높이 4m가 넘는 중장한 모습이다. 너른 암반은 두드리면 목탁 소리가 난다하여 옥석대(玉石臺)라 부른다. 마애보살 옆 바위를 통과하면 큼직한 바위들이 기립해 있다. 그중 한 바위에 ‘백운대(白雲臺)’라 새겨져 있는데 고운의 글씨라 전해진다. 어느 날 봉암사에 들었던 고운은 희양산 봉우리 아래에 흰 구름을 영원히 드리워 놓았다.

산문을 나선다. 백운대 맑은 계류가 예까지 따라 나선다. 바위도 물도 넓고 부드럽고 투명하다. 계곡 아래로 내려선다. 희디흰 시루떡 같은 너럭바위에서 멀리 희양산 봉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고운 역시 쉬이 걸음을 재촉하지 못했다. 혹은 몇 밤을 이곳에서 노닐었는지 모른다. 그는 바위에 ‘야유암(夜遊岩)’이라는 글을 남겼다. 야유(夜遊)란 ‘시를 읊으며 밤을 즐긴다’는 뜻이다. 새겨진 글씨는 흐르는 물살 같고 스치는 바람 같은 형상이다. 야유암에서 북쪽으로 300m쯤 떨어진 석벽에도 그의 글씨라 전해지는 ‘고산유수명월청풍(高山流水明月淸風)’이라는 각자가 있다.

희양산 아래 바위에 새겨진 글귀
고운 선생이 남긴 글씨라 전해져


봉암사 초입에 ‘야유암 역사유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봉암사는 일년에 한 번만 문을 열지만 야유암 역사유적공원은 언제나 열려 있다. 지증대사 적조탑비를 원형대로 재현한 모형이 있고 야유암과 백운대 각자, 창원의 월영대 각자 등도 재현되어 있다. 그리고 범해를 비롯한 고운의 시편들과 그의 발자취를 찾아온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고운의 시간과 그 이후의 시간을 집약해 놓은 곳이다. 지금 고운의 자취를 찾아 온 조선 후기의 대학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노래를 듣는다.

‘밝은 달빛 쏟아지는 백석탄에는/ 밤새도록 물소리 계곡 울리네/ 고운 신선 가신 뒤로 오지를 않고/ 지금 나만 이곳에 홀로 노니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이구의, 최치원 문학의 창작 현장과 유적에 대한 연구, 2008. 한국의 명산대찰, 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새벽에 홀로 깨어, 최치원선집, 돌베개, 2008.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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