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협상의 기술

  • 뉴미디어부
  • |
  • 입력 2018-11-10   |  발행일 2018-11-10 제23면   |  수정 2018-11-10
[토요단상] 협상의 기술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차관)은 5월24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을 ‘아둔한 얼뜨기’라고 비난하며 북미정상회담(6월12일 예정) 재검토를 시사했다. 펜스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강조한데 대한 반발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 부상 언급이 전해진 직후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했다. 북한의 전통국 협상 방식이었던 ‘지르기’가 트럼프에는 먹혀 들지 않은 것이다. 8월 말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4차 방북을 예고한 다음날 트럼프가 취소를 지시한 것이다. 실제 폼페이오는 10월 초 북한을 찾았다. 그의 10월 방북 성과도 손에 잡힌 것은 없었다. 트럼프의 방북 취소가 ‘협상의 승부수’였다면 결과적으론 실패한 셈이다.

북한은 데니스 로드먼이란 농구선수를 통해 트럼프가 쓴 ‘거래의 기술’이란 책을 전달받았다. 이 책이 북한 외무성 간부들의 필독서가 된지 오래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라’ ‘선택의 폭을 최대한 넓혀라’ 등의 기법이 나열돼 있지만, 북한은 처음 접한 실전에선 저자(著者)의 기에 눌렸던 모양이다. 북한은 두 번째(8월 방북 취소)엔 이런 약세를 보이지 않았다. 선거 전(前) 일진일퇴가 선거 후(後)엔 어떻게 변했을지 가늠하는 잣대가 지난 8일 만남이었는데, 미국 중간선거 후의 변화를 읽는 것도 함께 미룰 수밖에 없게 됐다. 어찌됐든 협상의 기술 원저자를 상대로 팽팽한 기싸움 저력을 보여주고 있는 북한을 우리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우리의 협상력은 어떤가.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의 ‘냉면·목구멍’ 발언과 그 후 대응은 그 힘을 가늠케 한다.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의 첫 거론 후 후폭풍이 이어지고 있다. 9월 남북정상회담 때 우리 기업 총수들이 북한에서 냉면을 먹으며 사리를 시키자 리선권이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네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총수들이 항의하긴 어려웠을 터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뒤늦게 “알아보는 중”이라는 게 통일부 입장이다. 강력한 문제 제기는커녕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새다. 이뿐만이 아니다. 10·4선언 기념차 평양에 간 김태년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보고도 리선권은 “배 나온 분에 예산을 맡겨서는…”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전후 맥락을 봐야” “총수들에게 확인해봤으나 그런 발언이 없다고 한다” “농담” 등으로 감싸고 있으나 구겨진 자존심은 대북협상 자세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옮겨 붙고 있다.

남북 협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선례가 있고 관행처럼 굳어진 것도 있다.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확립된 것이다. 1994년 3월 불바다 발언을 보자. 박영수 북한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이 우리측 송영대 통일부 차관 앞에서 “서울이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위협했다. 송 차관의 항의와 남한 측의 부정적 여론으로 박 부국장은 한동안 무대에서 사라졌다. 북한으로선 움찔했을 것이다. 다시 시계를 좀 돌려보자. 6월1일 기자들의 남북고위급회담 관련 질문에 리선권은 “무례한 질문”이라고 차단막을 쳤다. 10월5일 평양 민족통일대회 행사에선 조명균 장관이 시계가 틀려 3분 늦게 가자 그는 “시계도 관념이 없으면 주인 닮아서 저렇게…”라고 핀잔을 주기도 있다. 한두 번이 아니다. 리선권의 기선잡기에 협상의 룰대로 맞대응했더라면 ‘냉면·목구멍’ 발언이 가당키나 했을까.

리선권은 남측에겐 ‘전과자(前科者)’다. 북한에서 그는 남측을 길들인 스타가 돼 있을지 모른다. 남과 북은 한쪽이 그늘이면 한쪽은 양지가 된다. 완전 화해 때까지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게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는 순간 길들여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협상 결과물은 결코 환영받을 수 없다.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 ‘냉면·목구멍’ 발언은 돌이킬 수 없는 뼈아픈 실책을 막을 학습 기회를 준 것이리라.

최병묵 (정치평론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