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따라 청도 여행 .4] 탁영 김일손

  • 임훈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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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23   |  발행일 2018-10-23 제14면   |  수정 2018-10-23
세조 왕위 찬탈 비판하는 조의제문, 사초에 올린 ‘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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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 자리한 자계서원 전경. 김일손이 화를 당한 날부터 3일간 운계(서원)리 전천(前川)이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해 ‘자계(紫溪)’라는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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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종택 내 사당인 부조묘는 김일손 내외를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원래는 사림에 의한 사불천위(私不遷位)였지만, 1661년 자계서원이 사액되면서 국불천위(國不遷位)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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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계서원에는 김일손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은행나무 옆은 김일손이 어린시절 공부한 운계정사(雲溪精舍)가 있었던 곳인데 현재는 서원의 동재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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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계서원에 자리한 탁영선생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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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금은 1988년 보물 제957호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탁영금은 평소 국립대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지만, 오는 11월20일부터 2019년 2월10일까지 청도박물관에서 열리는 ‘탁영 김일손 특별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98)은 청도가 자랑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으로서 자신의 소명을 목숨과 바꾼 절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김일손은 거문고를 통해 유교의 이상향을 추구하며 음악적 재능을 발산한 선비이기도 했다. 시리즈 4편은 서슬퍼런 권력자들의 압박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직필(直筆)의 붓을 들었던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 김일손에 대한 이야기다.

#1. 고려 충신의 기개를 이어받다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의 ‘탁영’이다. 그의 집안은 고려말 절의를 지킨 정몽주, 길재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았다. 조부 김극일(金克一)은 여말선초의 대학자 야은 길재의 문인으로 벼슬길을 마다하고 효행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부친은 남계공(南溪公) 휘 김맹(金孟)으로 사헌부 집의를 지냈으며 중종반정 이후 이조참판에 증직됐다.


문과 초시에 장원하고 복시·전시 급제
연산군 즉위 후 무오사화로 목숨 잃어
1506년 중종반정 일어나면서 명예 회복

수많은 선비들과 거문고 연주하며 교류
보물 957호 지정 ‘탁영금’ 제작하기도



성리학적 가풍은 김일손에게도 이어졌다. 8세때부터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7세때는 밀양에 거처하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스승 김종직 역시 김일손에 대한 기대가 컸다. 김종직은 ‘나의 의발(衣鉢)을 전할 사람은 그대인데, 훗날 문병(文炳)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문병’이란 국가의 학술과 문장의 표준을 세우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일컫는다.

김일손의 형제애도 두터웠다. 김일손은 19세때 두 형과 함께 문과에 도전했지만 형들의 합격을 위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서는 시험을 포기했다. 당시 그의 두 형은 나란히 문과에 급제했다.

김일손 역시 부친상을 마친 후 벼슬길로 나간다. 1486년(성종 17) 문과 초시에서 장원을 차지한데 이어, 같은해 열린 복시와 전시에도 급제하며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된다.

#2. 꺾이지 않은 직필의 정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피바람이 조선에 불어닥친다. 무오사화는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가 사초(史草)를 빌미로 영남사림을 숙청한 사건이다. 성종 재위 당시 사관이던 김일손은 스승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기 위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다. 유학자로서 양심을 지키고, 역사기록에 충실해야 할 사관으로서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연산군이 즉위하고 성종실록 편찬이 시작되면서 김일손을 비롯한 영남사림은 세력다툼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유자광과 이극돈 등의 훈구파는 사초에 실린 조의제문을 두고 ‘세조가 단종을 죽인 것을 초나라 의제가 항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것으로 비꼬았다’며 연산군을 부추겼다. 또한 김일손이 기록한 사초에는 훈구파 이극돈의 비리가 포함돼 있었다. 이극돈의 전라감사 재임 당시 ‘성종의 국상 중 관기와 술을 마셨다’라는 기록을 사초에 올렸기 때문이다.

1498년 7월, 김일손은 함양 남계에서 금부도사의 함거에 실려 6일만에 한양으로 압송됐다. 평소 학자들을 마뜩치 않게 생각했던 연산군이 친국에 나섰고, 국문의 담당자는 이극돈과 유자광이었다. 결국 김일손을 비롯한 영남사림 상당수는 무오사화로 목숨을 잃고 만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스승 김종직과 그의 부친도 부관참시를 당하는 참화를 겪었다. 김일손의 가족 또한 청도를 떠나 전라도 남원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김일손은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억울함을 씻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의 후손들은 80년이 지난 후 탁영의 증손자인 김치삼(金致三) 때에 이르러서야 남원에서 청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일손은 1830년(순조 30)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됐으며, 1836년(순조 34) ‘문민(文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음악에도 능했던 선비

예로부터 선비들은 거문고를 가까이 두고 연주를 즐겨했다. 유교에 있어 거문고는 개인의 성정(性情)을 다스리고 도(道)를 싣는 사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이는 공자의 예약관(禮樂觀)에서 비롯됐는데, ‘예’가 인간사회의 바른 질서를 의미한다면 ‘악’은 인간사회의 조화를 의미한다.

특히 김일손의 거문고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그의 나이 27세때 오동나무를 구해 6현 거문고(육현금)를 만든 일화가 탁영문집에 전해진다. 당시 김일손의 집에는 이미 5개의 현이 달린 거문고인 오현금이 있었다. 그러나 김일손은 육현금을 구하고 싶었다. 고구려 음악가인 왕산악이 중국 진(晉)나라의 칠현금을 육현금으로 바꾸어 신라에 전한 역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거문고를 만들 나무를 구하기 위해 한 노파의 집앞을 지나던 김일손은 사립문 귀틀이 오동나무인 것을 발견한다. 한껏 들뜬 김일손이 집주인에게 물으니 “약 100년이 돼 이제는 부엌으로 들어갈 때가 됐다”는 답변을 들은 후 나무를 얻어 육현금을 만들었다.

거문고는 김일손이 수많은 선비들과 교류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주었다. 김일손은 독서당의 벗들과 함께 연주하는 것을 즐겼고, 30세 때는 거문고의 달인 백원(百源) 이총(李摠)과 함께 거문고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일손이 만들고 연주했던 육현금은 현재 탁영금(濯纓琴)이란 이름으로 전해진다. 오랫동안 그 존재가 잊혔지만 전북 완주군의 한 가문에서 탁영금을 보관 중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후손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보물 제957호로 지정된 탁영금은 현재 국립대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탁영금은 현존하는 거문고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 청도에서는 탁영금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음악을 통해 유교의 도를 실천하려 했던 김일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다.

#4. 청도에 남은 탁영의 흔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는 김일손을 제향하고 있는 자계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김일손이 화를 당한 날부터 3일간 운계(서원)리 전천(前川)이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해 ‘자계(紫溪)’라는 이름이 붙었다. 자계서원은 원래 김일손이 공부하던 운계정사(雲溪精舍)가 있던 곳이다. 1518년(중종 13) 자계사로 이름을 바꿔 선생을 제향했고 1578년(선조 11) 영남사림이 사우를 중수하고 그 규모를 확충해 자계서원이라 명명했다. 1661년(현종 2) 왕으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운계정사가 자리했던 서원의 동재 옆에는 김일손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는 듯한 대나무숲이 서원 뒤편에 자리해 있어 꼿꼿했던 유학자의 삶을 떠올릴 수 있다.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에 자리한 탁영종택 내 사당인 부조묘에서는 김일손 내외를 불천위(不遷位, 사당에 영구히 두고 모시는 것이 허락된 신위)로 모시고 있다. 원래는 사림에 의한 사불천위(私不遷位)였지만, 1661년 자계서원이 사액되면서 국불천위(國不遷位)로 바뀌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상인 탁영 종손
▨ 참고=탁영금 탄생 528주년 기념 세미나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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