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구운동으로 트라우마가 치유된다고?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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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20   |  발행일 2018-10-20 제16면   |  수정 2018-10-20
트라우마, 기억으로부터의 자유
20181020
바브 메이버거 지음/ 김준기·배재현·사수연 옮김/수오서재/ 276쪽/ 1만6천원

뇌에 자극을 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재처리
긍정적 인지 강화로 건강한 삶 살도록 도와
현재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자리매김


왜 힘든 기억은 유독 오래 남을까?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의 뇌는 특유의 방식으로 기억을 정리한다. 어떤 일은 장기 기억으로 남으며, 또 어떤 기억은 단편적으로 남거나 사라진다. 그런데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뇌는 이를 정상적으로 정리하지 못해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마치 음식을 잘못 먹고 소화하지 못하는 것처럼, 처리되지 않은 트라우마는 뇌에 각인된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불시에 되살아나 끔찍한 사건을 재현하고 일상을 무너뜨린다.

트라우마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전쟁, 성폭력, 자연재해, 가족의 죽음과 같이 극적인 충격만이 트라우마로 남는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친구에게 놀림을 받은 일, 처음 학교에 간 일, 누군가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 같이 사소한 경험까지도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트라우마의 기준은 사건의 크기나 심각성보다 이를 맞닥뜨렸을 때 내가 느끼는 감정에 있기 때문이다.

뇌 과학자들은 이렇게 처리되지 못한 기억을 ‘얼어붙은 기억’이라고 표현한다. 얼어붙은 기억은 나 자신과 세상,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을 왜곡시킨다. 자신을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여기거나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감정 기복, 우울증, 절망감, 공포, 과도한 긴장감, 자살 충동, 신체통증, 호흡곤란, 불면 등의 실질적인 증상을 유발한다.

‘일상의 문제에서 삶을 뒤흔드는 트라우마까지, EDMR 치료법’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뇌의 자연치유력을 바탕으로 트라우마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EMDR(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 :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 치료법을 다루고 있다.

기존의 트라우마 치료법은 대화와 상담을 기초로 한다. 내담자로 하여금 트라우마 사건을 상세히 기억하게 해 사건을 객관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인식을 전환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고통스러운 자극을 피하기 위해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화 치료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EMDR는 트라우마를 굳이 말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EMDR 치료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민감소실’ 단계는 트라우마 기억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는 것을 비롯해 청각·촉각 등으로 뇌에 양측성 자극을 주어 뇌가 이미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정보처리 기능을 활성화해 얼어붙어 있던 트라우마 기억을 재처리한다. 생각만으로도 겁에 질리고 두려웠던 기억이 단지 한편의 옛 기억으로 흘러가도록 돕는 것이다.

EMDR 치료는 기억의 처리에서 그치지 않는다. 새로 통합된 기억은 새로운 인지를 불러일으킨다. 가령 성폭력 피해로 스스로를 ‘무가치한 사람’으로 여겨왔던 사람은 트라우마를 재처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EMDR는 새로 통합된 긍정적 인지를 양측성 자극으로 강화해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다.

1987년 프랜신 샤피로 박사가 EMDR를 발견한 후 전 세계적으로 많은 치료자들이 EMDR 치료법 수련을 받았으며, 현재까지 개발된 트라우마 치료법 중 가장 많이 연구된 치료법이자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여러 국가 기관들로부터 외상후스트레스 장애의 표준치료법으로 공식 인정받았다. 또한 미국 9·11 테러, 태국 쓰나미 사태, 일본 고베지진 때에도 활용됐다.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 치료에도 국내 EMDR 전문가가 참여했다.

책의 1부는 구체적으로 EMDR 치료가 어떤 증상에 도움을 줄 수 있고, 그것을 어떻게 돕는지 소개한다. 2부에서는 저자인 메이버거의 20여 년간 임상경험에서 만난 내담자들의 사례를 소개한다. 아동기 가정에서의 문제, 전쟁, 성폭행, 부상, 상실 등의 사건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이들의 트라우마를 EMDR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해결했는지 치료 진행 과정을 상세히 소개한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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