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아듀 ‘대어초밥’ 노정섭 대표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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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9   |  발행일 2018-10-19 제41면   |  수정 2018-10-19
28년간 이끌어온 대구스타일 ‘스키다시’…불황의 벽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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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사장과 오랜 인연을 해온 17년 구력의 곽찬수 주방장(왼쪽)이 성큼 다가선 폐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직무에 열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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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 부산을 거쳐 대구로 와서 대구일식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간 28년 역사의 대어초밥을 이끌어 온 노정섭 대표. 그는 대구만의 스키다시문화를 리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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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스키다시 못지않게 최상의 육질을 자랑하는 대어 특유의 자연산 모둠회 한접시.

수성구 두산오거리 모퉁이에 늘 등대처럼 서 있었던 대어초밥. 노정섭 오너셰프는 횟집과 초밥 사이에서 30여년 외줄타기를 했다. 그런 그한테서 지난주 한통의 비감어린 전화가 걸려왔다. ‘이달 말일을 끝으로 대어를 폐업을 한다’는 고별인사였다. 조만간 신문에 ‘대어초밥 노정섭 인사올립니다’란 제목으로 고별 신문광고를 낼 모양이다. 그는 영원한 작별이 아니라 ‘잠시 작별’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번 폐업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같았다.

대어의 침몰은 현재 한국의 외식경영이 어느 정도로 힘든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노 사장은 “최소한 100년 이상 가는 식당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렇게 서둘러 문을 닫게 돼 시민과 단골에게 너무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의 고별사를 듣는 순간 서울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대구만의 일식문화, 그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대구 일식 향촌동·포정동·종로 계보
정통 잇는 쟁쟁한 조리사들 대거 배출

2000년대 들어 주름잡은 3대 일식당
대어·대번·대륙…각 사장은 동서지간
90년대 범어·두산동 거치며 승승장구
30여종 스키다시·버터 랍스터 히트
단골위한 룸…역대 시장‘해왕실’애용

적자 못이기고 이달말 폐업 고별인사
“100년 가게 꿈 못 이뤄 시민들께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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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1월8일 이전 오픈한 두산동 대어 입구 전경.

◆대구 일식의 여명기

1904년 1월23일, 유달리 추웠던 그날 대구읍성 북문 밖(대구역전) 허허벌판에서 경부철도건설사무소 개소식이 열린다. 철도가설, 그것은 일부 본토 일본인들에겐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찬스. 감독관, 철로 설계사, 현장 인부, 투기업자, 잡화상인, 브로커, 일본 기생 등 1천여명의 일본인이 대구로 몰려왔다. 대구읍성 내 달성관, 명석(明石), 화월(花月), 대화(大和), 대판옥(大阪屋), 자유사(自由舍), 야상옥(野上屋), 동경관(東京館) 등 20여개의 요정이 불야성을 이룬다.

50~60년대 대구를 대표하는 메이저급 일식당은 향촌동을 거점으로 한 해광·미화·미향·향미·삼거리 등이다. 이밖에 향촌동의 미옥·송죽·와싱톤·안락·가보자·낙미를 비롯해 삼영, 삼락, 이학, 낙락, 영락, 미림, 석백산 등이 그 주위를 포진했다.

정통 일식의 흐름을 확실하게 이어받은 건 향촌동 ‘미화(美華)’. 충청도 출신의 이종화 사장(작고)은 훗날 대구일보 사장직까지 제의받을 정도로 명망가가 된다. 그 덕분에 ‘미화 문중’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을 매우 방만하게 펼쳤다. 친척을 불러 옆에 미옥도 차리게 했다. 심지어 장어 도매상까지 경영한다. 하지만 향촌동 재개발이 일어날 때쯤인 70년대초 미화는 향촌동을 뜬다. 이 사장은 중구보건소 맞은편 자기 집으로 미화를 이전해 영업을 계속한다. 하지만 70년대 초 중구 포정동에 등장해 90년대 초 상서여상 근처에서 문을 닫기까지 지역 1세대 일식당을 초토화시켰던 ‘은성’ 때문에 사양길을 걷는다. 은성은 ‘막간 매운탕 서비스’로 인기를 더 끌었다. 아무튼 거기서 쟁쟁한 조리사들이 많이 배출됐다. 향촌동 주부센터의 김정식, 종로의 미성초밥 정훈성 사장, 다미초밥의 이준석 사장, 정용암씨(대구역전 길조초밥 운영), 이용규씨(동아쇼핑 구미지점 랑데뷰 책임자 역임) 등이다.

향촌동 옛 상업은행 대구지점 남서쪽 길 모퉁이에 주부센터를 오픈한 김정식은 한때 대구에선 도시락(8가지 반찬이 들어가는 하치모리 벤토)을 가장 많이 팔아 4층 빌딩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폐업. 거기서 일을 배운 문재신씨는 독립해 들안길에서 ‘수복초밥’을 반석 위에 올려놓지만 역시 문을 닫고 만다.

이밖에 옛 중앙시네마 골목 안 한주초밥 대표 이우태, 종로초밥의 장영수, 경산시 중방동의 생대구 전문 동해식당 대표 김석규, 7호광장 뒤편 생태탕 전문 명성식당 대표 최종하, 수성구 미락의 송기식 대표, 천일식당의 김유곤 대표, 소양식당의 김종호 대표, 대구역전 미원식당의 최동열 대표 등이 대구 일식계를 이끌었지만 다들 빛바랜 길로 접어들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새로운 전략으로 비교적 자기만의 시대를 구가한 후발 일식당이 바로 ‘대어’와 ‘대번’이랄 수 있다. 물론 현재 들안길 초밥 명가 ‘국수사’의 김유호 등도 그 흐름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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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1일 대어 폐업과 관련해 노정섭 사장이 직접 작성한 고별인사.

◆대어와 대번의 전성기

2000년대 대구를 주름잡은 3대 일식당이 있다. ‘대어·대번·대륙’이다. 다들 동서간이다.

대어의 노 사장 손위 동서가 대번의 강병덕 사장(작고) 이다. 노 사장과 강 사장은 동향(진주)이다. 노 사장은 청년기 부산·경남권에서 일식의 기초를 다졌고 20대에 주방장 겸 사장이 됐다. 기본기를 배운 뒤 대구 일식계에 도전장을 낸다. 대어와 대번 덕분에 부산·경남의 일식문화가 지역으로 유입된다. 지역에 무한리필 ‘스키다시’ 붐을 일으켰다. 공짜 스키다시, 이건 일식 정통파들에겐 참 송구스러운 대접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대구가 너무 공짜에 목을 매니. 일본식만 고집할 수 없었다. 과감하게 대구에 맞는 마케팅을 공략했다.

◆화끈한 인심의 대어

대어는 86년 시내 봉산동에서 ‘오사카성’으로 시작했다. 90년 1월3일 수성구 범어동으로 옮겨와 ‘대어’로 상호를 바꾼다. 도시계획 때문에 재차 94년 11월8일 현재 자리로 확장 이전한다. 그는 소나무를 유달리 좋아해서 1천500만원짜리 낙락장송 여러 그루를 심었다. 프라이버시를 확보하기 위해 룸을 최대로 확보했다. 여느 일식당 앉은뱅이 의자 대신 외국인, 허리 아픈 사람 등을 배려하고 신을 벗지 않아도 되도록 룸시대를 연다.

대어의 메뉴라인은 초기·중기·현재로 나눠진다. 개업 초기에는 무료 스키다시 돌풍을 일으키고 다음에는 버터바른 랍스터구이로 히트를 친다. 그리고 마지막엔 자연산과 양식을 확실하게 분리를 했다. 제대로 된 광어·도다리·강성돔시대를 열었다.

그가 지난 시절의 소소한 경력을 고백한다.

“78년 부산으로 가서 가구 일을 배우다가 적성에 안맞아 서면의 미조리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2년간 기술을 배운 뒤 당시 부산 최고의 일식당인 용두산 공원 밑 명송으로 갔어요. 아무것도 모르던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었죠.”

자립하고 싶어 대구로 진출한다. 대구시 서구 7호광장 옛 88회관 뒤편에서 85년 5월 ‘부산횟집’을 연다. 대구 일식계를 평정하리란 야망도 있었다. 그런데 처참하게 무너진다. 그해 여름, 난데없이 비브리오한테 습격당한 것. 다시 동아양봉원 서쪽에 ‘대영초밥’을 차렸다. 그때만 해도 정통 일식에 가까운 ‘부산식 일식을 고집했다. 대구 사람들한테 전혀 호응을 못받는다. 정통 일식 코스요리, 가이세키는 ‘언발에 오줌누기’였다. 또 6개월 만에 참패. 현실을 인정한다. 대구 사람들이 원하는 걸 만들자. 그렇게 다짐하고 내민 카드가 바로 당시 동서가 차렸던 중구 봉산동 대번 바로 옆에 오사카성이란 초밥집. 죽과 수프, 땅콩, 콩, 은행알, 멍게·해삼, 전복, 메로 구이, 튀김, 참치, 마키, 산낙지, 송이구이, 게 등 무려 30여종의 스키다시를 내 놓았다. 다들 입이 쩍 벌어졌다.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시미는 다른 조리사에게 맡기고 자기는 스키다시만 챙겼다. 생선값이 50만원이면 스키다시 재료는 100만원에 육박했다. 대번도 ‘무료 스키다시 전략’에 동조했다. 둘이 일으킨 스키다시 문화를 다른 일식당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88년 결혼 직후 그는 오사카성을 처분하고 그랜드호텔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으로 건너가서 대어시대를 연다. 자본금 2천500만원에 빌린 돈 1억3천여만원을 보탰다. 다들 대어가 채 3개월을 못 버틸 것이라고 예측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대어의 서비스는 대구스타일, 인테리어는 부산식, 단골들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기 위해 룸도 밀폐식으로 짰다. 대어의 버터랍스터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스키다시도 더욱 좋아졌다. 다른 업소들도 대어를 벤치마킹한다. 3개월 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을 잡지 못할 정도였다. 92년 넘치는 손님을 위해 황금네거리 근처에 ‘대륙’을 연다. 범어동 대어가 도시계획에 편입돼 뜯기는 바람에 94년 11월 두산동으로 옮기고 대륙은 IMF외환위기 때 동서인 박병면에게 넘긴다.

역대 시장들은 가장 큰 규모인 ‘해왕실’을 자주 이용했다. 대구에서 내가 낸데 하는 사람 치고 대어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정많고 살갑다. 그런데 막상 대구에 와 보니 오피니언리더들은 너무 근엄했다. 부산은 다이 앞에서 주인과 단골이 흉허물 없이 러브샷도 즐긴다. 먼저 망가지기로 맘을 먹는다. 분위기가 날로 훈훈해진다. 그가 나타나면 단골은 조건반사적으로 별별 술을 다 권한다. 마다하지 않았다. 하루 저녁에 10여종의 술을 무려 200잔 받아 마신 적도 있다. 간이 손상을 입은 만큼 대어는 ‘풍년’이었다.

대어는 10년전 1인분 10만원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2010년을 넘어오면서 경영이 많이 어려워진다. 김영란법 등으로 인해 손님들은 점점 비싼 음식에 쉽게 반응할 수 없었다. 또한 세월호와 메르스 파동 등이 손님 감소로 이어졌다. 연 1억원씩 적자가 났다. 수성구에 아리마온천을 열어 돌파구를 찾았지만 여의치 못했다.

그는 나눔의 의미로 길흉사는 반드시 챙긴다. 10만원 밑으로 부의금을 낸 적이 없다. 한번 맺은 인연도 오래 유지한다. 총주방장 곽찬수는 17년, 매니저 정형진은 28년 대어를 사수하고 있다. 폐업을 앞두고 그보다 직원들이 더 안타까워하고 있다. 폐업 관련 대어 전메뉴 18~31일 50% 할인. (053)768-2323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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