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17] 윤장혁

  • 입력 2018-09-20 00:00  |  수정 2018-09-20
대구 10월항쟁 선동 혐의로 수감된 노동운동가
20180920

 ‘10.1사건 이후 5관구경찰청에 검거되었던 노평 위원장 윤장혁씨에 대한 군정재판은 25일 오전 대구 심리원 5호 법정에서 열려 재판관으로부터 윤씨의 기소된 죄명은 군정법령 2호위반, 장총 1정, 탄환 10발, 일본도 1구를 불법 소지한 것의 설명이 있었으며~’
 윤장혁의 군정재판 상황을 전하는 영남일보 1947년 2월26일자 기사다. 그는 폭동을 선동했다는 유죄논고에 대해 줄곧 무죄로 맞섰다. 1946년 10월1일 일어난 10월항쟁을 당시에는 폭동으로 불렀다. 그는 폭동의 주모자 외에도 장총과 탄환, 일본도를 불법 소지한 혐의가 추가됐다. 또 이날 재판에는 공안과장이 증인신문을 했다. 공안과장은 “(윤장혁이) 폭동을 선동한 일은 없다고 믿으나 군중에 압력을 가했을 것”이라는 묘한 답변을 내놨다.
 

10월항쟁이 발발했던 그 당시에 많은 주민들은 기아에 허덕였다. 입에 풀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식량사정이 심각했다.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봄부터 이어진 식량난에 시민들은 참다못해 경북도청으로 몰려가 쌀을 달라고 호소하는 일이 잦았다. 굶주림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벌어졌다.
 

식량 부족은 전재동포의 급증과 그해 봄부터 발생한 콜레라도 원인이었다. 하지만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식량난이 예상됐음에도 대책을 내팽개친 미군정의 식량정책실패가 큰 몫을 차지했다. 일제잔재의 청산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농촌 쌀의 강제수집 등을 실시하는 미군정에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시월의 첫날에도 파업 중인 노동자를 비롯해 많은 시민들의 항의시위가 이어졌다. 급기야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고 시민들의 분노는 들불처럼 번졌다. 그 또한 10월항쟁의 폭동선동자로 지목되어 구속됐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11년 예천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보(현 경북고)에 입학했고 독서회를 조직했다. 민족독립운동에 첫발을 디뎠다. 그 뒤 조직한 ‘대구비밀학생결사’사건이 들통나 3년의 옥살이를 했다. 출소한 뒤 광복을 맞기까지의 행적은 뚜렷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1945년 12월에 그는 조선공산당의 산하조직인 전국노동조합대구평의회(‘전평’ 또는 ‘노평’) 위원장을 맡았다.
 

그로 인해 이듬해인 1946년 대구전매노조 파업에 관여하게 된다. 또 9월의 대구 총파업을 이끄는 주역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철도와 섬유공장, 대구우체국에다 출판노조까지 파업에 가세해 영남일보 등 신문발행마저 멈췄다. 그 직후 발생한 10월항쟁으로 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었다. 희생자 또한 적지 않았다. 3개월이 지난 시점에 신문은 8천여 명을 검거한 가운데 수형자가 1천명을 돌파했다는 보도를 하고 있다.


‘노평 위원장 윤장혁 공판은 27일 오전 10시부터 속개되어 5년 언도를 받았는데 동씨는 이에 대해 기자단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감상을 발표했다. 조선인이 무엇을 요구하며 싸우는가를 연합각국에서도 잘 이해할 것이다. 동시에 삼상회의 결정에 의한 미소공위 속개를 통해 민족의 자유 독립은 불원하다고 확신한다.’
 

5년형을 받아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는 영남일보 1947년 2월28일자 기사다. 그는 민족의 자유 독립이 머지않았다는 말로 자신 행동의 정당성을 드러냈다. 그는 수감 직후 폐병을 앓다가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 이감 후 10월항쟁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함께 구속된 최문식 등의 공판에 증인으로도 나섰다. 그는 복역 중에 6.25전쟁을 겪게 되고 그 와중에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월북했다가 휴전이 된 후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대남공작대원으로 남하한 그를 숨겨준 친구가 검거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 후 그는 내무부 치안국 대공담당요원이 되었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말하자면 변신을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누가 그를 대놓고 나무랄 수 있을까. 그 또한 오랫동안 진실이 파묻혔던 10월항쟁의 피해자였다. 더구나 그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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