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잊는 게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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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19   |  발행일 2018-09-19 제30면   |  수정 2018-09-19
어려운 환경에도 대학 졸업
복지기관서 근무 서른 그녀
이별 통보해 온 남자친구에
지속적으로 톡 보내 벌금형
그 마음은 재판도 해결못해
[수요칼럼] 잊는 게 답

서른 살 그녀. 이전에 전과는커녕 경찰서 문 앞에도 가보지 않았을, 참하고 성실해 보이는 아가씨였다. 어릴 때 부모가 이혼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열심히 공부해 장학금 받고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사회복지기관의 정식 직원으로 취업한 장한 여성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형사법정에 섰다.

그녀는 한 남자와 진지하게 사귀었고 결혼까지 생각했다. 지금까지 어떤 일이든 열과 성을 다해온 그녀는 연애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남자가 예전 여자친구에 대해 자꾸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이를 따지다 남자가 헤어지자고 한 거다. 그녀는 계속 그에게 전화를 하고 문자와 톡을 보냈다. 남자는 그녀 번호를 차단했다. 그녀는 친구 전화를 빌려 전화하고 사무실로 전화하고 공중전화로도 전화를 했다. 개인톡은 차단되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 있는 단톡방에서 톡을 보냈다. 남자가 그 단톡방을 나가면 또 다른 단톡방을 이용했다. 남아 있는 단톡방이 없어졌을 때는 친구를 시켜 단톡방을 만들게 하고 친구는 나가도록 해 두 사람의 채팅방을 만들기도 했다. 사귄 기간은 6개월이었는데, 그 두 배의 시간 동안 그렇게 했다. 남자가 참다못해 고소를 했다. 전화나 인터넷 등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문언 등을 반복적으로 상대방에게 도달하게 하면 처벌하도록 되어 있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돼 1심에서 벌금을 선고받았다. 그녀가 항소했고, 필자가 항소심 변호인으로 그 사건을 맡게 되었다.

흔히 ‘스토킹’이라고 하는 이런 사건은 ‘반복적’으로 상대를 괴롭혀야 범죄가 성립하기 때문에 전화한 횟수, 문자한 횟수, 톡을 보낸 횟수와 그 내용, 보낸 방법 등이 자세히 기재된다. 수백 회에 달하는 톡만 읽어도 가슴이 답답했다. 그 남자가 왜 1년 동안이나 참았는지 그게 신기해 보일 정도였다. 법적으로 억울하고 자시고 할 내용이 없는 사건이었다. 항소심 결론은 항소 기각이 뻔했다.

그래도 그녀는 억울하다고 했다. 그 남자가 결코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느꼈을 리 없다고, 그러니 법적으로 무죄라고 했다. 판례 검색도 엄청 했는지 이런저런 판례를 잔뜩 프린트해 왔다(물론 그녀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판례들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의 진심은 형사재판이 억울하다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 차인 걸 받아들일 수 없는 거다. 하지만 그 문제는 스스로 극복하거나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일이지 형사 법정에서 해결할 수 없다.

“자, 잘 생각해보세요. 수사 받고 기소되고 1심 재판 받고 그리고 이제 항소심까지 왔어요. 헤어진 지 벌써 2년이잖아요. 사귄 기간의 4배를 경찰서, 검찰청, 법원 왔다갔다 하며 보냈어요. 아직 젊은데 인생 낭비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이 재판에서 무죄 못 받아요. 똑똑한 분이니까 예상하실 거예요. 이미 이렇게 된 거 인연이 아닌가보다 하고 1심 판결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잊고 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 내 설득은 손톱만치도 먹히지 않았다. 그 남자를 증인으로 법정에 불러 따져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런 설득이 통할 것 같으면 여기까지 왔겠어? 어쩌겠어, 형사재판에서 하고 싶은 말이라도 하게 놔둬야지.’

결국 그 남자를 증인으로 소환했다. 나는 그녀를 대신해 그녀가 보낸 톡은 그냥 넋두리이지 공포감이나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지 않느냐고 따지는 괴로운 일을 해야만 했다. 그녀는 최후변론을 그가 연애 시절 그녀에게 잘못한 일들에 대해, 그리고 이별 통보의 부당함에 대해 그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꽉꽉 채웠다. 그녀는 2년 전 그날로부터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았다. 그 과거에서 그녀를 꺼내주고 싶었지만 형사사건 변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재판에서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를 안고 법원을 오가는 그녀가 참하고 진지한 젊은이라 안타까움이 더했다. 형사재판에서도 때론 잊는 게 답이다.

정혜진 (국선전담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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