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7] 여헌 장현광의 수제자 만회당 장경우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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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30   |  발행일 2018-08-30 제13면   |  수정 2018-09-18
스승의 집 직접 지은 뒤 보필…여헌문집 만들어 ‘추숭사업’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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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회당 장경우와 그의 스승 여헌 장현광을 배향하고 있는 구미 임수동 동락서원.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경내로 들어서면 강당 건물인 중정당을 비롯해 사당인 경덕묘, 동·서재인 근집재, 윤회재, 신도비각 등이 있다.

구미 출신 장경우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여헌 장현광의 수제자로 손꼽힌다. 특히 장경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도 스승 장현광을 모시고 피란길에 올라 성심껏 모셨다. 장현광 사후에는 고향에 머물며 여헌문집을 간행하는 등 추숭사업을 주도했다. 장경우에게 장현광은 스승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또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도 전력을 다했다.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영남 유생들과 상소해 이를 반대했고, 이이첨이 권세를 잡고 국정을 어지럽히자 이이첨을 참수하라는 소를 올리기도 했다.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의병장으로 나섰다.

#1. 아버지의 스승에게서 인정받다

1589년(선조22) 어느 날, 한 선비와 한 소년이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내 너를 믿는다.”

장내범은 장현광을 만나기에 앞서 어린 아들에게 한 번 더 당부했다. 아들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아버님. 염려 마십시오.”

장내범이 아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오냐. 내 아들이 어련하리.”

그 아들이란 바로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 1581~1656)였다. 장경우는 1581년(선조14) 정월에 구미 인동부 인의방(지금의 인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 1563~1640)이고, 어머니는 진위장군(振威將軍) 이운배(李雲培)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였다. 그리고 아홉 살이 된 지금, 아버지 장내범의 스승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으로부터 학문을 익히기로 돼 있었다.


12세에 임란 일어나자 스승 모시고 피신
장현광, 보은현감 되었을 때도 직접 수행
인목대비 폐모론에 유생들과 반대 상소
이이첨이 국정 어지럽히자 참수소 올려
정묘호란 땐 군량 모아 의병장으로 활약



사실 장현광은 장내범의 스승이었다. 장내범이 11세였을 때 인연을 맺은 후로 탄탄하게 지속되어온 관계였다. 장현광에게 있어 장내범은 초기 제자군 중의 한 사람으로서 여헌학파 내에서의 위상이 아주 높았다. 1916년 목판으로 간행된 병진본 ‘여헌선생급문록’에서 수많은 제자 가운데 첫머리에 수록되었을 정도였다.

그런 장내범의 아들답게 장경우는 곧바로 비범함을 드러냈다. 스승인 장현광은 물론이거니와 장현광 주변의 걸출한 인물들도 장경우의 영특함을 극찬했다. 그중에서도 동강(東岡) 김우웅(金宇), 한강(寒岡) 정구(鄭逑),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는 보다 각별했다.

장경우가 11세이던 1591년(선조24) 스승인 장현광과 앞의 세 학자, 그렇게 함께 가야산 유람을 떠났을 때였다. 김우웅이 장경우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다정하게 일렀다.

“이름을 경회(慶會), 자를 대래(大來)라 하면 좋겠구나.”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정구가 나섰다.

“‘회’보다는 ‘우(遇)’가, ‘대’보다는 ‘태(太)’가 더 좋겠다.”

먼저 말을 꺼냈던 김우웅도 동의했다. 이때부터 이름을 ‘경우(慶遇)’라 하고 자를 ‘태래(太來)’라고 했다.

#2. 이 땅의 정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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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서원의 사당인 경덕묘. 장현광과 장경우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가야산을 다녀온 이듬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2세가 된 장경우는 아버지 장내범과 함께 스승 장현광을 모시고 금오산으로 피신했다. 성심으로 모신 건 물론이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595년에 장현광이 보은현감(報恩縣監)이 돼 갈 때에는 직접 수행하면서 불편함이 없도록 도왔다. 이후로도 장경우는 한결같았다. 1597년에 정유재란 당시에도 스승 장현광을 모시고 청송과 봉화로 피란을 간 것이다.

그런데 1601년 장현광이 인동으로 돌아왔을 때 문제가 생겼다. 장현광의 집이 불타 없어진 것이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모시고 있겠습니다.”

“폐다.”

“어버이가 자식의 집에 머무는 것이 어찌 폐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장현광을 자신의 집에서 모신 장경우는 이후로도 장현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모시고 다녔다. 1606년에는 스승이 거처할 집을 직접 지은 뒤 자주 찾아가 살뜰히 보살폈다. 장경우에게 장현광은 스승 이상의 존재였던 것이다.

태산 같은 스승의 제자답게 장경우는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도 앞장섰다. 1621년(광해군13)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영남의 유생들이 연명해 반대 상소를 올렸는데, 그 중심에서 목소리를 높인 이가 바로 장경우였다. 장경우는 폐모론을 주도하고 있던 이이첨(李爾瞻)에 대한 참수소도 올렸다. 이이첨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죽인 것도 모자라 어린 영창대군마저 강화도에서 죽게 한 장본인이었다.

“이이첨이 권세를 잡고 국정을 어지럽게 하니 참형으로 다스리소서.”

당시 이이첨이 가지고 있던 엄청난 권력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장경우의 정의로운 성정은 1627년(인조5)의 정묘호란 때도 충분히 발휘됐다. 의병장이 돼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강화도로 출정한 것이다. 목숨을 건 출정이었다. 하지만 청과 강화했다는 소식에 눈물을 머금고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비분은 같은 해 진사 합격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1637년 스승 장현광이 이승을 하직했다. 56세로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음에도 장경우는 몸을 돌보지 않고 상을 치렀다. 그리고 고향에 머물면서 장현광 추숭 사업을 주도적으로 처리해 나갔다. 장현광의 문집인 ‘여헌문집(旅軒文集)’을 간행하고 ‘제선의절(祭先儀節)’을 만들어 그 뜻이 널리 시행되도록 권장했다. 또 화산서당(花山書堂)을 건립해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때 아들인 남파(南坡) 장학(張, 1614~1669)도 장현광 문하에 입문함으로써 무려 3대가 장현광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장경우는 1654년(효종5)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돼 영릉참봉에 제수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다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2년 뒤에 76세를 일기로 만회당에서 눈을 감았다. 만회당은 장경우가 62세 되던 해에 지은 건물로 그의 호이기도 했다. 사후에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된 장경우의 묘소는 현재 구미 인동동의 정산(鼎山)에 있다. 아울러 임수동에 있는 동락서원(東洛書院)에 스승인 장현광과 함께 배향돼 있다.

#3. 마음의 근원에 집중하다

장경우가 16세 때의 일이었다. 중용을 배우는 과정에서 스승 장현광이 ‘불성무물(不誠無物)’이라는 구절에 집중할 것을 주문했다.

“세 번 반복해 읽어보라.”

장경우는 스승의 뜻을 받잡아 세 번 아주 또박또박 읽었다.

“무슨 뜻이냐?”

“성(誠), 즉 성실함이 없으면 천지도 사물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옳다. 그러하다. 천지가 그러할진대 사람이나 학자는 말할 것도 없으리.”

스승의 그 말은 장경우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고, 그의 학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는 걸출한 저서 ‘만회당집(晩悔堂集)’으로 이어졌다. 장경우가 지은 ‘만회당집’은 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다. 특히 ‘법천설(法天說)’과 ‘선악적서(善惡籍序)’는 두고두고 되새겨볼 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장경우는 먼저 ‘법천설’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쳤다.

“마음을 일러 심원(心源)이라 한다. 모든 법(法)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심원에서 그치지 않는 것이 하늘의 도이고, 스스로 굳건하게 서서 쉬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다. 바로 법천(法天)이다. 하늘의 도리 ‘천(天)’, 그 도리를 본받는 ‘법(法)’.”

그러면서 덧붙였다.

“무릇 사람은 하늘의 도리를 따라야 한다. 그것이 유학의 핵심이다.”

여기서 사람이 본받아야 할 하늘의 도리를 장경우는 ‘불이(不已)’라고 보았다. ‘불이’란 어떤 현상이나 행위가 사이에 끊어지는 법 없이 계속됨을 표현한 말이다. 즉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침이 없는 하늘의 도리를 장경우는 또한 ‘성실지리(誠實之理)’라고 보았다. 말하자면 천지만물이 각자의 쓰임새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늘에 성실함의 이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하면 하늘의 뜻이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느냐? 그 뜻을 마음에 본받아 품고, 잊지 않고 계속해서 성실하게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항상 깨어있으라고 당부했다.

아울러 ‘선악적서’를 통해서는 이렇게 가르쳤다.

“무심히 범하면 허물이 되고 유심히 범하면 악이 된다. 이는 고의 없이 잘못을 범하면 허물이 되나 작심하고 잘못을 저지르면 악이 된다는 뜻이다.”

즉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기에 앞서 왜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과정과 계기에 집중한 것이다. 여기에 드러난 장경우의 뜻은 ‘법천설’의 뜻과도 일맥상통했다. 바로 자신의 자리에서 도리를 다하라는 것, 그러기 위해 항상 깨어있으라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선이 자라나면 악은 사라지고 악이 자라나면 선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힘써 선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문헌=박인호의 논문 여헌학파의 동향과 만회당 장경우의 위상, 최정준의 논문 만회당의 생애와 학문,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디지털구미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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