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12] 청송의진 의병장 소류 심성지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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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2   |  발행일 2018-08-22 제13면   |  수정 2018-08-22
66세에 의병장 맡아 항일 무장투쟁…‘감은리 전투’ 大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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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의진 의병장 심성지가 쓴 ‘강병론’. 의병장으로서 자신을 위로하고 부하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마음에서 지은 글로, 항일의병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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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의진 해산 이후 심성지가 은거했던 소류정. 소류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소박한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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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지의 시와 글을 모아 후손들이 1907년에 간행한 소류선생문집(小流先生文集).

청송 노래산(老萊山)에서 흘러나온 작은 물줄기가 북으로 흘러 청송심씨의 마을 덕천리(德川里)를 크게 에워싸고는 이내 용전천(龍纏川)으로 흘러든다. 덕천(德川)이다. 마을의 남쪽 한가로운 산자락에 정자 하나가 그 작은 물줄기를 마주하고 있다. 소류정(小流亭)이다. 구한말 청송의 의병대장이었던 어른, 그러나 스스로를 ‘작은 물줄기’라 이름하였던 소류(小流) 심성지(沈誠之)의 정자다.

역학 등 연구…유학 통달한 선비로 명성
1895년 日 명성황후 시해 사건 벌어지자
전국서 국권회복 위한 의병투쟁 움직임
청송유림 의진결성후 심성지 의병장 추대
의성·이천과 연합해 감은리 전투서 승리
해산 후엔 학문 정진 제자 수십명 가르쳐


#1. 유년시절부터 총명했던 심성지

심성지는 1831년 12월18일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행(士行), 호는 소류다. 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심단(沈鍛)이고, 어머니는 남평문씨(南平文氏) 문석구(文錫龜)의 딸이었다. 심성지는 유년시절 기골이 준수하고 머리가 총명했다고 한다. 그는 9세 때 어머니 문씨를 잃었는데 엄숙하고 성실하게 상을 치르고 이후 11세가 되어서야 처음 글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채찍질 없이도 스스로 깨닫고 명확하게 알았으며 당송(唐宋) 대가들의 서적 및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들을 줄줄 외울 정도였다고 전한다.

18세 즈음 심성지는 둔와(遯窩) 유양흠(柳養欽)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그는 ‘중용(中庸)’을 읽던 중 ‘소덕천류(小德川流) 대덕돈화(大德敦化)’라는 구절에 마음이 동하게 된다. ‘소덕’이란 사소한 덕, 모든 존재의 바탕에 깔려 있는 덕성과 마음을 뜻하고, ‘대덕’이란 소덕이 모여 이루는 만물의 큰 인덕을 뜻한다. 즉 ‘소덕천류 대덕돈화’란, 소덕은 작은 냇물의 흐름과 같지만 본류에 모여 넓고 큰 덕을 이루면 만물을 단단하게 변화시킨다는 의미다. 심성지는 이 구절의 ‘소류(小流)’ 두 글자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리고 훗날 거처하는 곳을 소류정사(小流精舍)라고 이름 지었다.

1859년에는 계모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도 그는 슬픔 속에서 3년 상을 치른 후 문을 닫고 학문에 열중했다. 이 무렵 심성지는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게 되는데 초시에는 여러 번 합격하지만 회시에서 실패한 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평생 독서에 전념했다. 그는 비록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역학(易學)과 심성론(心性論)을 연구해 당대에 유학을 통달한 선비로 명성이 높았다. 50세가 넘은 1883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상을 치르고 묘소 근처에 여막(廬幕)을 지어 조석으로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 고종 28년인 1888년에 그의 학행이 조정에 알려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천거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894년에는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올랐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2. 청송의진의 의병장으로 활약

1895년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친일정권을 사주해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을 가속화해나갔다. 심성지의 분노와 반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위기의 시대였고, 전국에서는 의병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96년 3월 초 ‘청량산의진’과 ‘안동의진’으로부터 격문이 청송에 도착한다. 특히 ‘안동의진’의 소모장 류시연(柳時淵)이 30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들어와 청송의 무기고(武器庫)를 탈취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자신들의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청송의 유림에서는 청송의진(靑松義陣)의 결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청송향교에 모인 유림 200여 명은 의진 결성을 결의하고 의병장(義兵將)으로 심성지를 추대했다. 당시 66세의 고령이었던 심성지는 향중(鄕中)의 뜻에 따라 청송의병장을 수임했다.

청송의진은 청송도호부 객사인 운봉관에 지휘부를 두었으며 객사 앞 용전천 백사장에서 훈련에 들어갔다. 동시에 모량도감(募粮都監)을 설치해 군량미를 모았다. 또한 참모진을 구성했는데 중군장에 김대락(金大洛), 우익장에 남두희(南斗凞), 소모장에 서효신(徐孝信), 사병도총(司兵都摠)에 남승철(南昇喆) 등을 임명해 진용을 갖췄다. 이때 심성지의 장손 심능찬(沈能璨)은 부친을 도와 군관(軍官)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심능찬은 의병을 사칭해 민폐를 끼치는 자들을 응징하기도 했다.

청송의진은 창의 후 주변의 안동, 진보, 영양, 의성, 영덕 등의 의진, 그리고 경기도에서 남하한 김하락(金河洛)의 이천의진 등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연합부대를 편성해 활동했다. 특히 청송 감은리(甘隱里) 전투는 청송·이천·의성 등 3진 의병부대가 연합한 값진 승리였고, 이를 계기로 사기가 한층 고무됐다.

청송의진은 고종의 해산령에 따라 감은리 전투 이후인 5월25일 본진을 해산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진을 소규모로 분산해 유사시 서로 조응하는 것을 계책으로 삼았고, 면군 체제 하에서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면군 체제는 군사적 활동뿐 아니라 향촌사회의 혼란기 행정치안의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도 한 것이었다. 이후 청송의진은 면단위 출진소를 기반으로 경주·흥해·영덕 등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던 중 청송의진은 7월 하순 이천의진을 돕기 위해 출전 중에 마평(馬坪, 청송군 부동면 상평리)의 화전등(花田嶝)에서 관군의 기습을 받고 패전하고 말았다. 일명 ‘화전등전투(花田嶝戰鬪)’였다. 패전후 관군의 추격을 받던 청송의진은 끝내 각처를 전전하다가 해산하고 말았다. 청송의진의 마지막 교전이었던 화전등전투가 벌어진 청송군 부동면 상평리에는 현재 항일의병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다.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청송의진을 비롯해 대한민국 의병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교육의 장으로 인기가 높다.

#3. 소류정

감은리 전투의 대승과 청송의진의 해산 이후 심성지는 소류정에 은거했다. 그는 ‘장자(張子)’의 ‘동서명(東西銘)’과 ‘주자(朱子)’의 ‘거가요훈(居家要訓)’을 자리 오른쪽에 내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보았다고 한다. 스스로의 학문에 정진하는 가운데에도 수십 명의 문하들에게 도를 강학하고 학문을 논하며 교분을 돈독히 유지했다. 심성지는 강론을 마치면 항상 단정히 앉아 깊이 침잠(沈潛)하며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고 전해진다.

소류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작은 건물이다. 전면 2칸은 툇마루로 정면에 사분합문을 설치하고 측면에 판문을 설치해 폐쇄성을 갖췄는데 툇마루 바깥쪽으로 쪽마루를 둘러 문을 열었을 때 보다 너른 마루와 개방성도 확보하고 있다. 후면의 2칸은 온돌방으로 측면에는 문을, 뒷면에는 창을 내었다. 소박하면서도 촘촘한 구성이다. 소류정은 부친상 이후인 1885년에 처음 지어졌다고도 하고 감은리 전투 이후인 1896년에 창건했다고도 한다. 현재의 정자는 이후 붕괴 직전에 있던 것을 1997년 원형대로 중건한 것이다. 협문 앞에는 심성지를 기리는 사적비가 서있다. 검은 오석이 거울처럼 빛나는 비석이다. 그 뒤로 세 개의 작은 비가 나란하다. 심성지의 훈장증, 아들 능찬의 표장증, 증손 상기(相基)의 무공훈장증이 비석에 새겨져있다. ‘소류’의 덕(德)이 3대에 걸친 의(義)로 이어졌으니 ‘대덕돈화’라 할 만하다.

심성지는 1904년 음력 11월13일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청송 화전등에 위치한 항일의병기념관에는 심성지가 쓴 ‘강병론’과 후손들이 그의 시와 글 들을 모아 1907년에 간행한 소류선생문집(小流先生文集)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강병론’은 의병 대장으로서의 자신을 위로하고 부하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마음에서 지은 글이라 한다. 선생의 생가는 그를 뒤쫓던 일제에 의해 방화 전소되었고,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생가 터 뒤에는 아직도 서늘하고 푸른 대나무 밭이 무성한데, 그것은 1896년 ‘청송의진’이 움켜쥐었던 죽창의 본디 모습이라 전한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문헌=청송의 향기, 청송군지, 청송문화원 자료, 국가보훈처 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한국국학진흥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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