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리처드 3세’가 자주 무대에 오르는 이유

  • 윤철희
  • |
  • 입력 2018-07-12   |  발행일 2018-07-12 제30면   |  수정 2018-10-01
연극 보면 시대 읽을 수 있어
‘리처드 3세’가 주목받은 이유
촛불시위 때문이란 분석도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 주는
권력에 대한 성찰 기회 부여
20180712
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 연출평론가

셰익스피어는 연극의 목적이 자연에 거울을 가까이 갖다 대는 것이라고 했다. 연극이란 세상을 세밀히 들여다보고 무대에 반영하는 예술이니, 연극을 보면 시대를 읽을 수 있단 말이다. 요즈음의 연극을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돌이켜 봐야 할 문제가 보인다. 올 상반기 한국 연극무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 중 하나는 셰익스피어의 변용이다. 셰익스피어극은 고전이 주는 무게감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세계 각처의 무대에 오르는 스테디셀러이니만큼 새삼 놀랄 바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과 독일, 그리고 프랑스에서 서로 다른 시각으로 각색된 ‘리처드 3세’가 올 상반기 국내 극장을 달구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셰익스피어가 영국 역사를 소재로 쓴 10편의 역사극 중 한 편인 ‘리처드 3세’는 리처드가 형과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그린 배신과 음모의 궁정 드라마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가장 매력적인 악인으로 불리는 리처드 3세는 요크가의 셋째 아들로, 뛰어난 식견과 언변, 그리고 정치적 감각까지 갖추었지만 추한 외모에 왼팔이 말려든 곱사등이라는 이유로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하지만 그의 열등감은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는 비틀린 욕망으로 변하고, 그는 뛰어난 언변과 유머감각, 그리고 교묘한 권모술수와 탁월한 리더십으로 친족과 가신을 비롯한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권력의 정점에 서고야 만다. 이 흥미진진한 권력드라마가 이리도 자주 공연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2월 예술의 전당에 오른, 한아름이 각색하고 서재형이 연출한 ‘리처드 3세’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다 목표에 다다랐을 때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추락을 그린 무대였다. 리처드는 자신을 ‘그림자’로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으로 훌륭한 배우가 되어 세상과 사람들을 속이고, 왕좌에 오를 것임을 공표한다.

6월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독일의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마리우스 폰 마이엔부르크가 각색한 ‘리처드 3세’는 주인공에 대해 보다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사람의 연민과 동정을 살 만한 인물’로 그리고자 한 의도대로, 오스터마이어의 리처드 3세는 관심과 사랑, 존중에 굶주린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무대 중앙에 길게 매달린 마이크를 통해 관객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어차피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사랑 속에 군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악당이 되어 모든 즐거움이 헛된 것임을 증명하고야 말겠다!” 누구나 가진 열등감과 탐욕, 그리고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주인공에게 관객들은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도살된 가축처럼 발목에 줄이 묶여 거꾸로 매달린 리처드의 육체는 욕망의 허망함, 그리고 타인의 관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 한 어리석음이 낳은 고독을 상징한다.

또 최근 공연된 무대는 프랑스의 장 랑베르-빌드가 연출 및 배우로 출연한 2인극으로, 자신을 리처드 3세라 생각하는 광대가 분장실을 중심으로 리처드 3세의 악행을 놀이로 풀어낸 극이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풍선 터뜨리기, 마리오네트 조종하기, 악기놀이 등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또 권좌를 지키기 위해 휘두르는 악행을 한낱 놀이쯤으로 여기는 리처드 3세의 잔혹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리처드 3세: 충성심의 구속’이란 부제처럼, 이 놀이에 참여한 관객으로 하여금 권력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또는 부당한 권력 유지에 공모한 자 또한 악인임을 일깨워준다.

장 랑베르-빌드와 공동연출을 한 말라게라는 한국에서 ‘리처드 3세’가 자주 공연된 이유로 촛불시위를 꼽았다. 말라게라는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거나 정부의 힘이 지나치게 막강해 민주주의 시스템에 구멍이 생긴 나라에서는 리처드 3세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권력이 얼마나 많은 인물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성찰하는 기회를 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우리의 권력은 어떻게 쟁취되었는가? 우리는 부당한 권력에 공모하거나 또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악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되새겨 볼 때다.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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