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사천 실안∼선진리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8-06-15   |  발행일 2018-06-15 제36면   |  수정 2018-06-15
바다 물비늘이 멸치 떼처럼 ‘반짝’ 은빛멸치는 뜨거운 땅에 누워 ‘반짝’
20180615
실안 바다의 원시 어업인 죽방렴.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고기를 잡는다. 죽방렴 멸치. 상처가 없고 육질이 좋다(작은 사진).
20180615
선진리 성 안 순국한 공군장병을 기리는 충령비가 서있다.
20180615
선진리성.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왜성이다.
20180615
선진리 성 안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심은 벚나무가 가득하다.

사천 땅은 진주만에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사천만(泗川灣)의 양쪽에 걸쳐 있다. 그 모습은 나비의 날개를 닮았다고 한다. 날개 사이 사천만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출전시켜 승전했다. 만의 동안과 서안은 모습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서안은 갯벌이 많고 해안선은 군데군데 이가 빠진 톱니 같다. 동안은 서안에 비해 매끈한 편이다. 그래서 달리기에 좋다.

◆ 실안 죽방렴

실안(實安). 열매가 가득하고 편안한 곳, 사천만 동쪽 해안의 가장 남쪽마을이다. 낙조로 유명한 바다, 낚시로 유명한 해안, 아직 원시적인 방법으로 멸치를 잡는 마을. 근래에는 아주 미끈하게 닦아놓은 해안도로가 유명하다. 낚시꾼은 보이지 않고 도로는 지글지글 끓고 있다. 그 뜨거운 땅에 은빛 멸치들이 누워있다. 상처 없는 피부가 반짝거린다.

실안 바다 물비늘이 멸치 떼 같다. 잔잔하다. 잔잔한 바다에 참나무 말뚝이 촘촘히 박혀 있다. 죽방렴, 태곳적부터 사용해 온 고기잡이 그물이다. 죽방렴은 물길이 좁고 물살이 세고 간만의 차가 크고 수심이 얕은 곳에 설치한다. 하늘에서 보면 V자 모양이다. V자의 꼭짓점에 자루그물을 걸어 두는데, 그물은 밀물 때는 열리고 썰물 때는 닫힌다. 밀물 때 들어온 물고기는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러면 뜰채로 건져내면 그만이다. 어부와 사투를 벌이지 않으니 상처가 없다. 현대는 초현대적인 것, 미래적인 것을 갈망하면서도 가장 자연적인 방법으로 기르고 획득한 것을 열망한다. 그래서 죽방렴 멸치는 비싸다.


사천만 동쪽해안의 남쪽 마을 실안
참나무 박아 고기 잡는 그물 죽방렴
상처 하나없이 매끈·육질 좋은 멸치
삼천포 마리나·바닷가 초록의 포도밭

이순신장군 적선 13척 격파 사천해전
임란때 日 장수가 만든 왜성 선진리 성
왜군이 코·귀 잘라간 무덤 조명군총
성안은 해마다 흐드러진 벚꽃 장관



잔잔한 실안 바다는 백조다. 저 수면 아래 힘센 조류를 숨기고 있다. 동네 아낙의 말을 빌리자면 ‘물빨이 억수로 쎄’다. “그 물살을 이기려면 힘이 쎄질 거고, 그러니 멸치가 육질이 좋지예.” 바닷가 멸치 작업장의 어둑한 그늘 속에서 어부가 멸치를 삶고 있다. 살짝 삶은 멸치를 커다란 채반으로 떠 올린다. 검붉은 팔뚝이 우락부락하다. 실안 바다의 멸치는 힘이 세고, 어부는 더 힘이 세다.

◆ 포도밭이 있는 해안 길

실안마을의 해안도로가 계속 이어지는 줄 알았다. 그렇게 해안을 따라 영영 달릴 줄 알았다. 길은 마을과 함께 끝난다. 실안의 자연부락인 산분령(山分嶺) 마을이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데 복작복작한 느낌이 든다. 되돌아 나가 해안도로에 오르면 한동안 높은 산길이 이어진다. 이 고갯길을 산분령 혹은 실안고개라 한다. 고갯마루 쉼터에 몇몇 사람들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고개를 넘으면 삼천포 마리나가 나타난다. 요트, 모터보트 등이 정박하는 항구다. 여름이면 스쿠버다이빙과 수상스키, 제트스키 등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주변에 밭이 많다. 놀랍게도 포도밭이다. 바닷가에 초록의 포도밭이 이어진다. 한없이 바라볼 수도 있겠다. 밭고랑에 누워 포도 잎 그늘 덮고 파도 소리 들으며 이따금 손 뻗어 포도 알 따 먹는 한량 같은 오수의 명일이 그립다.

포도밭이 사라지면 모충(慕忠)공원 이정표가 나온다. 옛날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충무공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면서 시를 남겼는데, 봉사단체에서 시비와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우고 사천시에서 공원화했다고 한다. 숲이 울창한 자그마한 곶이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에 초소가 있었다고 한다. 곶의 이름은 달래끝 혹은 월천포(月川浦), 동네 사람들은 거북의 등을 닮았다고 거북등이라 부른다. 거북등에 오르면 드넓은 바다가 한눈이다. 초소병처럼 가슴이 쫙 펴진다.

◆ 선진리 성

모충공원을 지나면서 해안도로는 사천대로로 이어진다. 바다 쪽 너른 농공단지를 멀찍이 바라보며 달리는 길이다. 도로가 바다와 완전히 안녕하기 전에 선진리성(船津里城) 이정표를 만난다. 선진리는 배 나루터 마을로 옛날에 선소(船所)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는 고려 때 조창을 설치하면서 쌓은 토성이 있었다. 토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모리 요시나리가 그 주변에 돌을 쌓아 석성이 되었다. 선진리성은 왜성(倭城)이다.

선진리 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의 전투가 있었다. 하나는 선조 25년인 1592년 사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2차 사천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적선 13척을 격파하여 승리했다.

또 하나는 선조 31년인 1598년 왜군과 조명연합군의 전투다. 조명연합군은 패배했고 수천 명이 사망했다. 성 앞에 ‘조명군총’이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선진리 성을 탈환하려다 숨진 연합군의 코와 귀를 잘라 본국으로 보냈다. 이후 사람들은 버려진 채 남은 시신 위에 흙을 덮어 주었다. 그것이 지금의 무덤이다.

성안은 온통 벚나무다. 1918년 즈음 옛날 이곳에 주둔했던 왜장의 후손이 성의 일부를 사들여 벚나무 1천여 그루를 심고 조상을 기리는 석비를 세웠다고 한다. 벚나무 속에 이충무공의 ‘사천해전승첩비’가 하늘 높이 서 있다. 석비가 있던 자리에는 임무 수행 중 순국한 우리 공군 장병들을 기리는 충령비가 세워져 있다. 벚꽃은 해마다 장관을 이룬다.

원래 선진리성은 서·남·북쪽이 모두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곶이었던 게다. 지금은 서쪽만 바다와 마주하고 있다. 남쪽과 북쪽은 대규모 산업단지다. 사천만의 동안에도 옛날에는 갯벌이 많았다. 그 많던 갯벌은 이제 농공단지, 산업단지로 변했다. 사천만 서쪽 사람들은 불만이 많다고 한다. 남쪽 산업단지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높고 긴 담장에 줄줄이 달린 보안카메라가 따라왔다. 반듯반듯하게 뻗은 산업로에는 보안 차량이 느리게 배회하고 있었다. 가까운 바다의 작디작은 섬은 탯줄 같은 길을 허옇게 내놓고 있었다. 밀물인지 썰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 창원 방향으로 가다 내서분기점에서 10번 남해고속도로 진주 방향으로 간다. 진주 지나 사천IC에서 내려 3번 국도를 타고 삼천포로 간다. 삼천포 대교 서쪽 실안마을에서 해안관광로, 사천대교를 타고 북향하면 된다. 사천IC에서 내려 반대로 진행해 내려오는 것도 좋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