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4] 관직 버리고 청송에 은거한 귀암 권덕조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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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13   |  발행일 2018-06-13 제19면   |  수정 2018-06-13
인종 승하 후 벼슬 버리고 낙향…어진 마음, 바위가 된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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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 자리한 귀암정.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승하하자 권덕조는 벼슬을 버리고 청송에 내려와 귀암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정자는 화마로 소실돼 지금의 귀암정은 후손들이 세웠다. 정자 앞에 ‘귀암권선생사적비’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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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조의 아들 권준을 기려 세운 송만정은 귀암정의 남동쪽 반변천 가에 자리하고 있다.

반변천이 서시천을 껴안고 마을 앞을 흐르니, 마을은 물 위에 떠있는 듯하여 ‘한상(漢上)’이라고 했다. 마을 뒤쪽에는 광덕산(廣德山)이 웅장하게 솟아있는데 배산임수의 터가 한양을 닮아 ‘새로운 한양’이란 뜻의 ‘신한(新漢)’이라고도 했다. 지금은 산의 이름을 빌려 마을의 이름을 삼았으니, 청송 진보의 광덕리(廣德里)다. 진보면 소재지 어디서나 그 산의 우뚝함을 실감할 수 있다. 그 아래 ‘귀암정(歸巖亭)’이 자리한다. 귀암(歸巖) 권덕조(權德操)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1. 소견이 넓고 너그러운 성품의 권덕조

권덕조는 고려 태사공 권행의 21세손으로 중종 2년인 1507년 안동의 금계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윤보(潤甫), 호는 귀암(歸巖)이다. 아버지는 창신교위(彰信校尉)를 지낸 권응희(權應禧), 어머니는 진안백씨(眞安白氏) 백원형(白元亨)의 딸이었다. 증조부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던 권곤(權琨), 조부는 습독(習讀)을 지낸 권사영(權士英)이었다.

훤칠하고 건장한 체구의 권덕조는 어릴 때부터 착실하고 믿음직했으며 말이나 태도에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소견이 넓고 생각은 깊었으며 늘 마음이 너그러웠고, 힘든 일을 당해도 민첩하게 처리해내는 재간이 있었다고 전한다.


광덕산 자락 단정히 뻗어내린 곳
팔작지붕 건물 돌담 둘러싸인 귀암정
세월에 낡았지만 웅장한 기개 여전

고려 태사공 권행의 21세손 권덕조
어릴적부터 소견이 넓고 어질어
종숙부 충정공 권벌에게 학문 배우고
인종 때 관직 나아가 제용감판관 지내
임금 잃고 낙향 후학 양성에 힘쓰며
동시대 학자 퇴계의 학문·철학 계승
슬하에 3남1녀…3남 권준 재주 뛰어나
임란 때 곽재우 휘하에서 혁혁한 공



그는 종숙부인 충정공(忠定公) 권벌(權)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권벌은 우직하고 충직한 성품의 영남 사림으로 중종조에 조광조 등의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정치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또한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가서 부친을 간호할 만큼 효자였다. 옳다고 생각한 것을 말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던 권벌은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어머니의 산소가 있는 봉화 닭실마을에서 10년 이상을 칩거했다. 그는 23년 아래인 퇴계 이황과도 학문적인 공감을 나누었으며 중종에게 하사받은 ‘근사록(近思錄)’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권덕조가 권벌에게 학문을 배운 것은 이 시기로 여겨진다.

권덕조는 인종 때 관직에 나아가 처음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오르고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를 거쳐 학행으로 추천되어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을 지냈다. 1545년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기록에는 ‘근사록을 보고 결심한 바가 있었다’고 전한다. 스승 권벌이 늘 지니고 다녔다는 주희(朱憙)의 ‘근사록’은 ‘소학’과 함께 중종대 사림파의 상징적인 서적이었다. 이황 역시 근사록을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과 함께 높이 여겼다. ‘근사’는 ‘논어(論語)’에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것부터 생각하면(切問而近思)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실천적인 윤리문제를 밝히고 완성된 인격으로서의 성인(聖人)을 이루는 데에는 나의 몸에 가깝고 절실한 문제를 성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2. 청송 진보에 귀암정 짓고 후학 양성

권덕조는 낙향해 청송 진보의 광덕산 아래에 귀암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동시대 학자였던 퇴계의 학문과 철학을 계승했다. 그는 나라에서 불러도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주위에서 왜 벼슬하지 않느냐고 궁금해하면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인종에 이어 어린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와 윤씨 외척의 난정 가운데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그의 스승이었던 권벌은 파직되었고 이어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 이듬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을사사화 이후 권덕조는 사람이 있어도 잘 모르게 하고 인사도 모두 피했다. 귀암(歸巖), 그는 낙향 후 마치 바위가 된 듯했다. 때때로 그 마음이 눈물에 젖어 윤보(潤甫)라 하였을까.

그가 은거했던 귀암정은 화마에 소실됐다. 후에 사림에서 그를 기려 옛 집터에 귀암사(歸巖祠)를 세우고 향사(享祀)를 받들었다. 이후 귀암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고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다시 세워 옛 이름을 따랐다. 귀암정은 정면 4칸, 측면 2.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등 뒤로는 광덕산 자락이 단정하게 뻗어 내려오고 앞에는 들이 넓다. 정자는 매우 낡았고 어둡게 퇴색되었지만 대단히 웅장하고 바윗돌처럼 단단해 보인다. 그것은 굽히지도 추켜세우지도 않은 정직한 얼굴로 먼 남쪽의 거대한 비봉산(飛鳳山)과 대면하고 있다. 돌담 밖에 근래의 것으로 보이는 ‘귀암권선생사적비’가 서있다.

권덕조는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서(曙)는 장사랑이며 차남 해(咳)는 봉사이고 3남 준(晙)은 군자감정(軍資監正)과 판관(判官)에 제수됐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권덕조는 여든이 넘은 고령이었다. 그는 셋째 아들 권준을 곽재우 장군의 화왕산성 의진에 보내어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시를 지어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권덕조는 선조 27년인 1594년에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안동시 와룡면 태리 소등촌 진봉산 증조묘 위에 묻혔으며 참판 유치명(柳致明)이 비문을 지었다.

#3. 권덕조의 아들 권준과 송만정

권덕조의 3남 권준은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특히 지극한 효성과 외경의 마음으로 항상 아버지 곁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또한 형제간에도 우애가 깊어 늘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에 잠을 자며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의 명으로 곽재우 휘하에 들어간 권준은 뛰어난 전략으로 전승을 이끌어 화왕산성을 지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란이 끝난 후 임금이 공신들에게 포상할 때 권준은 은거해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호를 ‘송만(松巒)’이라 하고 마치 세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행동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훗날 후손들이 권준을 기려 세운 송만정(松巒亭)이 귀암정의 남동쪽 반변천 가에 있다. 송만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ㄷ’자형 평면인데 가운데 2칸을 대청으로 열고 양쪽 방 앞에만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설치했다. 정자에는 매우 높은 자연석 기단에 큼직한 돌계단이 놓여 있다. 저절로 고개 숙이고 조심하게 만드는 길이다. 대청에 오르면 눈앞에는 광대한 하늘뿐이다.

권준의 부인은 평산신씨 신응위(申應渭)의 딸이다. 100세를 향수해 인조조에 사찬(賜饌)을 받고 고을은 조세를 탕감받았다고 전해진다. 권준과 신씨 사이에는 아들이 없어 조카 신지선(申止善)을 입적했다. 아들 지선 역시 지극한 효자였다고 하며 효종이 사찬하고 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렸다는 사적이 읍지에 전한다.

귀암정 상량문에 ‘행의(行誼)가 청고(淸高)하고 지절(志節)이 강개하다. 일편의 붉은 충절이 고금과 같다. 원컨대 후손들에게 효충의 명의를 가르쳐 아손들이 청숙한 기운으로 태어나 밝은 세대에 많은 인재가 나와 무궁하리라’ 하였다. 귀암은 송만으로, 그리고 지선(止善)으로 이어졌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문헌=청송군지. 청송누정록. 청송의 향기. 한국국학진흥원 홈페이지. 안동권씨대종회 종보 4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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