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남해 시문마을 돌창고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8-06-01   |  발행일 2018-06-01 제36면   |  수정 2018-06-01
섬마을 돌창고, 아트 뮤지엄 변신

삼천포대교와 창선대교를 건너 창선도를 가로지른다. 다시 창선교를 건너 남해도 삼동면 영지리 시문네거리에서 멈춘다. 남해의 서쪽과 동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접점이다. 고려 말 성리학의 대가이자 문필가였던 정승 백이정이 전왕의 복위를 꾀하다 남해로 유배되어 왔을 때 활터를 만들어 활을 쏘러 다니면서 이 네거리에 홍살문을 세웠단다. 그래서 마을이름은 시문(矢門), 사람들은 살문이라고도 부른다. 홍살문 섰던 자리에 ‘시문마을’ 표지석이 있고 그 뒤에 창고 하나가 서 있다. 슬레이트 박공지붕을 얹은 돌창고다.

육지와 다리 연결전 청돌로 만든 창고
섬 교통요지에 두고 양곡·비료 보관

돌창고, 다리 연결하며 원래 기능 상실
과거·현재 공존 예술프로젝트 시동
카페·아티스트 레지던스 ‘애매하우스’
매월 지식과 경험 나누는 ‘애매 살롱’
공예품·농수산물 가공품 판매 ‘돌장’
주민·귀촌인·관광객들 함께 어울려

20180601
시문마을 돌창고. 슬레이트 박공지붕에 남해의 청돌을 다듬어 쌓아올렸다.
20180601
돌창고 내부. 전시를 위한 최소의 손질만 더했다.

◆시문마을 돌창고

푸른 빛 도는 청돌(靑石)을 주사위 모양으로 다듬어 탄탄하게 쌓아올린 건물이다. 박공 아래에는 작은 살창이 나 있다. 옆으로 돌자 가운데 홍예문이 열려 있고 안쪽에 미세기문이 달려 있다. 나무로 짜고 철판을 댄 묵직한 문이다. 나무는 모서리가 갈라졌고 녹슨 철판에는 ‘농협비료보관창고’라는 글자가 흐릿하게 남아 있다. 안으로 들어선다. 의자 따위의 몇 가지 소품이 있고, 가장자리를 따라 초록의 풀이 자라 있다. 가느다란 천장의 빛이 벽을 타고 내려온다. 천장 한가운데에는 샹들리에가 떡하니 매달려 있고 마룻대에 상량문이 선명하다. ‘1967년 1월24일 14시 상량.’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다.

남해에는 이러한 돌창고가 여럿 남아 있다. 남해와 육지가 다리로 연결되기 전, 농업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마을들이 공동으로 양곡과 비료를 보관하기 위해 교통의 요지마다 창고를 두었었다. 그때는 시멘트나 철근과 같은 건축자재를 육지에서 들여오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석공들이 섬에서 나는 청돌을 캐어 하나하나 지게로 지어 나르고 다듬어 만든 것이 남해 돌창고다. 하여 돌창고는 진정한 의미의 섬이었던 남해의 한 시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리가 놓이면서 돌창고는 원래의 기능을 상실했다. 새로운 자재로 새로운 창고가 지어지기도 했다. 2015년, 시문마을 돌창고가 도예가 김영호와 문화기획자 최승용에게 넘어갔다. 그들은 ‘공간배치를 통한 삶의 대안제시 연구소 헤토로토피아’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과연 청년이 시골에 살며 밥벌이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을 시작했다. 이른바 ‘돌창고 프로젝트’다. 국내 유명 건축가에게 창고의 리모델링을 의뢰했다. 건축가는 1년간 그대로 두라고 조언했다. 1년은 창고의 빛을 느끼고, 모습을 관찰하고, 소리를 듣는 시간이었다. 느린 행보 덕에 마을 어른들의 마음도 얻었다. 지금 돌창고는 ‘아트 뮤지엄(Art Museum)’이다.

돌창고는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 전시를 위한 최소한의 손질만 더했다. 전시 조건은 작가가 남해에서 얼마간 지내며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것. 전시가 없을 때는 누구나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지만 전시 중에는 3천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수익은 작가들에게 돌아간다.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유토피아다. 현실적인 동시에 신화적인 공간이며, 과거의 토간인데 현재와 섞여 있고, 실재 공간이면서 실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돌창고 안에 있으면 그러하다. 먼 옛날 같고 미래 같고, 우주의 원소인 나를 우주인 내가 보는 듯하다.

20180601
애매하우스의 동창 밖에 마늘밭이 펼쳐져 있다.
20180601
시문마을의 당산나무. 150년 된 팽나무로 매년 동제를 지낸다. 뒤쪽에 새로운 창고가 들어서 있다.

◆애매하우스

돌창고 바로 옆에는 ‘애매하우스’가 자리하고 있다. 카페이자 아티스트 레지던스다. 카페에서는 간단한 음료와 디저트를 판매한다. 음료는 커피 몇 종류, 하동의 녹차가루로 만드는 녹차 라테, 악양의 평사리 들판에서 나는 곡물로 만든 얼음 동동 미숫가루가 있다. 디저트는 철마다 바뀌는데 요즘은 가래떡 구이다. 남해와 하동의 멥쌀을 주원료로 하동 제일 떡 방앗간에서 뽑은 가래떡에 남해의 유자로 만든 청을 올린다. 접시를 싹싹 핥아먹게 만드는 맛이다. 한쪽에는 지역 공방에서 만든 초와 디퓨저 등을 판매한다. 애매하우스에서는 매월 둘째 주 수요일 오후 7시에 ‘애매살롱’이 열린다. ‘애매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모임’이다. 매월 주제별로 관심 있는 지역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매달 둘째 주 토요일에는 돌창고와 애매하우스 사이 통로에서 ‘돌장’이 열린다. 남해와 인근 소규모 작업자들의 공예품과 농수산물 가공품을 판매하는 장이다. 귀촌한 사람, 지역주민, 관광객이 함께 어울린다. 카페, 돌장, 애매살롱의 강좌 등은 모두 작가들에게 경제적인 밑바탕을 만들어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카페 동쪽으로 난 가늘고 긴 창밖으로 마늘밭이 보인다. 넓은 밭이 아니니 자식들 나눠 주고 집에서 소비할 정도의 양일 게다. 노인이 웅크리고 앉아 마늘을 뽑고 계신다. 남해 마늘 수확은 지난주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뽑은 마늘은 밭에서 3, 4일 정도 햇볕에 말린다. 그러면 마늘잎에 있던 영양분이 뿌리인 마늘로 향해 가고 그 동안 마늘의 크기가 조금 더 커진다. 노인의 마늘 수확은 며칠 전부터 시작된 모양이다. 몸이 허락되는 만큼만 천천히 조금씩 그리 수확해 왔을 게다. 비는 오지 않을까 밤마다 하늘을 쳐다봤을 게다. 밭에 가지런히 누운 마늘들이 바짝 말라 은빛이다. 노인도 은빛이다.

노인의 마늘로 마늘빵을 만들면 좋을 텐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애매하우스에서는 남해 마늘로 마늘빵을 만들어 팔았다.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잔뜩 사와야지 했었다. 지금은 맛볼 수 없다. 그만하기로 했단다. 훌륭한 빵을 만드는 사람의 생계는 안정적인 판매량과 직결될 것이다. 포기는 충분히 당연한 일이고 아쉬움은 욕심이다.

마늘밭 옆으로 도로가 지나간다. 길은 시문마을회관과 금줄 두른 정자나무를 지나 동쪽으로 간다. 정자나무는 150년 된 팽나무다. 마을 사람들이 동제를 올리고 오가는 길손들이 쉬는 곳이다. 나무 뒤쪽에 커다란 창고가 있다. 새로운 자재로 지은 새로운 창고다. 노인의 마늘은 저곳에 저장될까. 돌장이 커져 정자나무 주위로 난장이 펼쳐지는 상상을 한다. 그날 새로운 창고는 활짝 열려 있고 노인의 은빛 마늘이 별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 창원 방향으로 가다 내서분기점에서 10번 남해고속도로 진주 방향으로 간다. 진주 지나 사천IC에서 내려 3번 국도를 타고 남해 창선도로 들어가 창선교 지나 1024번 지방도를 타고 이동면 방향으로 약 3.5㎞ 정도 가다보면 시문네거리가 나온다. 네거리 왼쪽 독일마을 가는 길가에 시문마을 표지석이 있다. 애매하우스 앞이나 마을 회관 앞쪽에 주차할 수 있다. 시문마을 돌창고에서는 3월부터 10월까지 5회 기획 전시가 열리며 입장료는 3천원이다. 전시가 없는 날은 무료다. 운영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목요일은 쉰다. 돌장은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열린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