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 오미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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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25   |  발행일 2018-05-25 제36면   |  수정 2018-05-25
독립운동가만 24명 배출한 풍산김씨 500년 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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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풍산김씨 영감댁. 영조 때인 1759년에 처음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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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암고택. 19세기에 학암 김중휴(金重休)가 지은 집으로 솟을대문 앞에 항일구국지사 김재봉의 어록비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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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벽당. 18세기 중엽의 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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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암고택 뒷길이자 허백당 앞길. 오른쪽이 허백당으로 풍산김씨 종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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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 동구의 구시나무거리. 다섯 그루의 왕버드나무와 구수정 정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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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암문정공신도비. 비 옆에 청백송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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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나무뚝의 느티나무. 수령 200년 정도 되었다.

풍산읍은 몇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은 입방체의 건물들이 오밀조밀 들어선 거리, 좁은 도로의 산만하지만 의기양양한 질서, 삶을 떠받치는 정오의 권태 같은 것들 말이다. 그곳은 언제나 안정적인 호흡을 경험하게 하는 오래된 소읍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읍내의 가장자리 즈음에 닿자 열 지어 선 원룸과 빈 상가들이 보였다.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데 스스로 소외된 짠하고 천진한 얼굴이었다. 곧 길 양쪽으로 들이 펼쳐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미1리’라 새겨진 커다란 얼굴을 만났다. 동구에서 마중하는 손짓 같았다.

선조때 학자 유연당 김대현 아홉형제
오형제 등과상징 왕버드나무 다섯그루
구시나무거리의 끝자락 고택마을 안내
기단높은 사랑채가 날아갈 듯한 영감댁
항일구국지사 김재봉 어록비 학암고택
산세 기운 막기 위해 심은 황소나무뚝
마을 내다보는 언덕 광복운동 기념공원
오미동 독립운동가 기리는 촛불 모양 탑


◆오미리 구시나무거리

좌(左)는 논이요, 우(右)는 산이다. 동그마니 앉은 산의 아랫자락을 사뿐히 지르밟고 마을로 들어간다. 자분자분 굽이 돌자 남향으로 앉은 집들이 보인다. 논물에 오래된 지붕들이 들어앉았다. 마을을 바라보는 길가 산그늘에 구수정(九樹亭) 현판을 단 정자 하나가 서있다. 아홉 나무 정자다. 그 곁으로 다섯 그루 왕버드나무가 열광적이고 웅장하게 서있다. 오래전 처음에는 아홉 그루였다고 한다.

오미리(五美里)는 풍산김씨(豊山金氏)의 500년 세거지다. 조선 초기에 풍산김씨 김자순(金子純)이 처음 터를 잡았고, 마을에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했다. 이후 후손 잠암(潛庵) 김의정(金義貞)이 을사사화의 피바람을 뒤로하고 낙향하여 ‘능(陵)’은 임금의 무덤을 뜻하므로 오무동(五畝洞)이라 고쳤다. 다섯 이랑의 마을이다. 김의정의 손자는 선조 때의 학자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으로 아들이 아홉이었다. 그는 1600년 장자에게 시켜 동구에 왕버드나무 아홉 그루를 심게 하고 거리 이름을 구수목가(九樹木街)라고 명명했다.

왕버드나무 한 그루는 일찍 고사했다. 우연인지 유연당의 아들 한분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여덟 형제는 모두 진사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다섯은 문과에 급제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인조(仁祖) 임금이 ‘팔연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칭찬하며 오미동(五美洞)이라는 동명을 내렸다고 전한다. 왕버드나무는 언제부터인가 다섯 그루만 남아 오형제의 등과(登科)를 상징하는 대과목(大科木)으로 숭상되었고 구시나무거리는 ‘수’가 오랜 세월 구전되면서 ‘시’로 변해 구시나무거리가 되었다.

◆오미 고택마을

구시나무거리 끝에 ‘오미 고택마을’ 안내판이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들이 여럿이다. 골목길이 모두 이어져 있어 지도를 대충 훑고 발길 가는 대로 간다. 오른쪽으로 가면 마을회관이다. 낡은 기와지붕의 옛 건물과 핑크색 기둥의 새로운 건물이 나란하다. 마을회관 맞은편 집에서 흰둥이가 조르르 달려 나온다. 맑은 눈으로 반갑게 바라볼 뿐, 한번 짖지도 않는 순둥이다. 녀석이 먼 눈길로 나의 걸음을 쫓는다.

마을회관 바로 옆에 영감댁(令監宅)이 있다. 영조 때인 1759년에 규장각 직각(直閣)을 지낸 김상목(金相穆)이 처음 지었다. 순조 때 학남(鶴南) 김중우(金重佑)가 증축했는데 그의 아들 낙애(金洛崖) 두흠(金斗欽)이 통정대부 동부승지의 벼슬을 지내 영감댁이라 부르게 됐다. 기단 높은 사랑채가 날아갈 듯하다. 영감댁 동쪽에 나란한 집은 학암고택(鶴巖古宅)이다. 19세기에 학암 김중휴(金重休)가 지은 커다란 집으로 솟을대문 앞에 항일구국지사 김재봉(金在鳳) 선생의 어록비가 서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다 옥고를 치르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했으며 조선 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로 추대되었던 인물이다. 비에는 ‘조선 독립을 목적하고’라는 글귀가 칼날처럼 새겨져 있다.

학암고택 뒷집은 허백당(虛白堂)이다. 김대현이 명종 9년인 1554년에 처음 건립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아들이 다시 세웠다. 동구에 왕버드나무를 심었던 그 해다. 허백당은 중종 때의 청백리 김양진(金楊震)의 호로 김대현의 증조부다. 대문은 잠겨 있다. 뜰에는 잘 가꾸어진 수목이 울창해 집은 가만히 은일하다. 허백당에서 서쪽으로 가면 영감댁 뒷골목이다. 거기에 오미동 다섯 구릉 가운데 두 번째 구릉의 끝자락이 내려서는데 ‘황소나무뚝’이라 부른다. 김대현이 산세의 기운을 막기 위해 황소 같은 소나무를 심어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거대한 느티나무가 거인의 우산처럼 가지를 펼치고 있다. 어느 날 황소나무가 쓰러졌고 영감댁 주인이 대신 느티나무를 심은 것이 200여 년 전이라 한다.

황소나무뚝 서쪽에는 삼벽당(三碧堂)이 있다. 18세기 중엽 즈음 김상구(金相龜)가 지었다는데, 삼벽당은 아들인 김종한(金鐘漢)의 호다. 신식 대문에 채도 높은 빨간 우체통, 그리고 담장 너머 키 낮은 비닐하우스가 사람 사는 집임을 말해주는데 마당에 훌쩍 자라난 잡초들과 빈 텃밭은 주인의 긴 출타를 또한 전해준다.

◆언덕 위 꺼지지 않는 촛불

삼벽당 서쪽 언덕을 오른다. 오미골의 동쪽과 서쪽을 경계 짓는 북경재 언덕으로 마을의 두 번째 구릉이다. 언덕은 꽤나 높아서 끝자락이 절벽처럼 뚝 떨어진다. 그 위에 ‘잠암문정공신도비’가 마을 입구를 내려다보고 있다. 잠암이라면 오릉을 오무라 고친 김의정이겠다. 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의 허리는 ‘광복운동기념공원’이다. 한가운데 촛불 모양의 탑이 서 있다. 그리고 오미동 출신 독립 운동가의 이름들이 탑을 둘러싸고 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짓고 단식으로 순절한 김순흠(金舜欽),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장관 김응섭(金應燮),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金祉燮), 만주에서 일본 총영사를 사살하고 자결한 김만수(金萬秀) 등 마을의 독립 운동가는 24분에 이른다.

이 언덕에는 수령 300년이 넘는 청백송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나무는 2015년 고사했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주변을 파헤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청백송 대신 꺼지지 않는 촛불이 들어섰다. 그 견결한 항상심의 빛 아래 무장무장 자라난 나무들과 오래된 기와지붕이 고요히 펼쳐져 있다. 안타까움은 지니되 너그러움을 잃지 않는 평화를 믿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55번 중앙고속도로 안동방향으로 간다. 서안동IC로 나가 예천방향 34번 국도를 타고 가다 괴정삼거리에서 좌회전해 924번 지방도를 타고 조금 가다보면 오른쪽에 오미1리 오미동이라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이 있다. 옆길로 들어가 왕버드나무와 정자가 있는 쉼터 앞쪽에서 우회전하면 마을회관 앞쪽에 주차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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