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參勤戒 그리고 거북이 漫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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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17   |  발행일 2018-05-17 제30면   |  수정 2018-05-17
자신의 가치 깨닫도록 하면
아이들은 제 스스로 자란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까지
거북이의 걸음처럼 천천히
오래도록 참으며 기다려야
[여성칼럼] 參勤戒 그리고 거북이 漫步
여성칼럼 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 연출평론가

멀리 있는 제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20년 전 영문학과 4학년 2학기 ‘셰익스피어 II’ 과목을 수강했단다. 갸름한 얼굴에 책만 내려다보던 그 청년이라 짐작한다. 기말고사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가는 학생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앞길에 수많은 도전과 실패, 그리고 극복이 놓여있기를 바란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잠시 말문이 막힌 나는 회의 직전이라 짧은 통화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자네가 잘 받아먹어서 그런 거네. 어설픈 훈시로도 삶을 바꾼 자네 자신에게 감사하게.”

맹자는 군자삼락(君子三樂) 중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3번째 즐거움으로 꼽았다. 천하의 왕이 되는 것은 군자삼락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거칠 것 없이 자유로운 군자의 배포가 통쾌하기까지 하다. 어쨌건 재능이 뛰어난 인재를 배우나 무대예술가로 기르는 일은 연극쟁이에게도 행복한 일이다. 연극은 인간의 다양한 모습에 공감하고 역사의 변화무쌍한 국면을 이해하며, 이에 대한 통찰을 예술가의 안목이라는 체에 걸러 관객이 공감하도록, 또는 관객과 교감하도록 펼쳐내는 일이다. 따라서 이성과 감성의 조화, 그리고 잘 훈련된 신체와 발성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배우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엄포를 놓는다. 샤워 후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반해, 그저 남 앞에 나서는 것이 좋아서 배우가 되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그러고도 기어코 하겠다고 덤비는 놈은 하나씩 차근차근 가르친다. 타고난 재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끊임없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교육’을 뜻하는 단어 ‘에듀케이션(education)’의 어원이 ‘에두카레(educare)’임을 상기해보면, 누구든 사람을 키우는 일은 재미있다. 그리스어로 ‘에(e: 밖으로)’와 ‘두카레 (ducare: 끌어내다)’를 합친 ‘에두카레(educare)’는 교육이 학습자의 잠재력을 발현시키는 활동임을 명시해준다. 교육이란 인간의 선천적 잠재력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 활동이며, 학생의 깨달음과 성장의 과정에 함께하는 일이다.

‘열등생’의 성장을 돕는 일은 더욱 보람이 크다.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교육은 훈육(discipline)보다 양육(nurture)이 먼저다. 즉, 정신적 육성에 주안점을 둔 가르침이다. 그리고 정신적 성장은 자존감의 회복을 전제로 한다. 강의실에는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구석에 숨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 의사인 형과 비교당해 열등감에 찬 눈을 깊이 눌러쓴 모자 아래 감춘 남학생, 더딘 성장에 아버지의 눈총을 받아 입을 다물고 살아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여학생도 있다. 이들과 눈을 맞추고, 기회를 주어 작은 성취를 이루도록 하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가치를 깨닫도록 하면 아이들은 절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거북의 걸음처럼 아주 천천히 오래도록 진행된다. 그들이 스스로 깨닫고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힘을 기르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한 공부가 동반되어야 한다. 20여 년 동안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다산 정약용에게 인근 지역의 젊은이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들었다. 그들 중 강진 관아 아전의 15세 된 아들인 황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둔하고, 막히고, 답답하니 학문을 잘 할 수 있는지를 다산에게 물었다. 이에 다산은 그것이 오히려 학문하는 태도에서 장점이 되니,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며 또 부지런할 것’을 당부한다. 황상은 이 글을 ‘삼근계(參勤戒)’라 부르며 평생을 스승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했다 한다.

아마도 내가 20년 전의 제자에게 해 준 일은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믿도록 한 것일 게다. ‘느리지만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면 제 자신이 된다’는 진실도 함께. 셰익스피어의 힘을 빌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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