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19] 안동 고산칠곡...眉川(미천) 따라 굽이진 七曲…측백나무 벗삼으니 道學(도학)의 길 멀고도 가깝다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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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03 07:50  |  수정 2021-07-06 14:52  |  발행일 2018-05-03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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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 이상정이 칠곡을 설정한 후 그림으로 그린 고산칠곡도 중 총도(總圖). 고산칠곡도는 총도와 함께 곡별로 그린 개별도로 구성돼 있다.

고산칠곡은 안동시 일직면과 남후면에 걸쳐 있는 미천(眉川) 물줄기에 조성된 구곡이다. 미천은 낙동강 지류로, 안망천(安望川)이라고도 한다. 구곡은 계곡 환경에 따라 매우 드물지만 이처럼 칠곡으로 설정돼 경영되기도 했다.

이 고산칠곡을 경영한 주인공은 대산(大山) 이상정(1711~81)이다.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이상정은 이황 이후 영남학파 최고의 성리학자로 꼽히며 ‘소퇴계’로 불릴 정도로 학문이 깊었다.

서른 살 때인 1740년 미천 물줄기를 지나면서 아름다운 경관에 이끌린 이상정은 이곳을 마음에 담고 있다가, 1767년 대석산에서 뻗어나온 제월봉(霽月峯)이 미천과 만나는 둔덕 위에 세 칸 짜리 서실을 지었다. 그러나 물이 너무 가깝고 바람이 많이 불어 기거하기가 마땅하지 않아 3년 뒤 지금 자리로 옮겨 지었다. 새로 옮긴 곳은 마을이 가까웠으나 앞에 송림이 있어 지낼 만했다. 이름은 ‘고산정사(高山精舍)’라 지었다. 고산이라는 이름은 고암(高巖) 또는 암산(巖山)이라 불리던 마을 이름을 하나로 합친 것이다.


이황의 학통 이은 대산 이상정
영남학파 최고 성리학자 손꼽혀
‘소퇴계’불릴 정도로 학문 깊어
서른살 때 眉川 물줄기 지나며
경관 이끌려 서실 짓고 학문 닦아
이후 자리옮겨 고산정사 지어 은거
고산칠곡 설정하고 ‘칠곡시’ 남겨



이상정은 고산칠곡을 설정하고 칠곡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고산칠곡도를 함께 남겼다. 이상정은 고산정기(高山亭記)를 지어 손수 한 첩자(帖子)에 적고 그 아래에 칠곡의 산수와 정(亭)·대(臺) 등을 그리고, 굽이를 따라서 시를 쓴 후 ‘고산정기병도(高山亭記竝圖)’라고 명명했다. 그림이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고산칠곡의 지점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상류에서 시작하는 고산칠곡의 이름은 1곡 늠연교(凜然橋), 2곡 세심정(洗心亭), 3곡 유연대(悠然臺), 4곡 고산정사(高山精舍), 5곡 심춘대(尋春臺), 6곡 무금정(舞禁亭), 7곡 무릉리(武陵里)다.

이상정의 ‘고산잡영(高山雜詠)’ 중 ‘고산칠곡시’는 각 굽이에서 일어나는 흥취에 의탁하여 관물구도적(觀物求道的) 도학(道學)의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상정은 주자의 시(무이도가)에 대한 인식도 이황처럼 탁흥우의(托興寓意)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상정의 고산칠곡시

‘공산(公山)의 남쪽 기슭 시냇물 그윽하고 그윽하며/ 여기저기 돌들 삐죽 솟아 배 뒤집히기 쉽네/ 건널 때마다 두려워하는 마음 잃지 않으면/ 구당 협곡도 예부터 안전한 물길이라네’

1곡을 읊은 시다. 1곡 늠연교는 안동시 일직면 원호리와 광음리 경계인 미천의 여울이 얕게 흘러내리는 곳이다. 지금은 송리철교가 놓여 있다. 1곡의 물길 환경을 묘사하면서 도학의 길이 멀고 험하지만,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며 그 길을 가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구당협(瞿塘峽)은 암초와 절벽이 펼쳐지고 급한 여울이 휘돌아 흐르는 중국 양쯔강의 협곡을 말한다.

‘넓은 들 끝나는 곳에 냇물 고여 소가 되고/ 돌계단 이끼 낀 낚시터 물가를 빙 둘러 있네/ 늦은 봄날 제자들과 목욕하고 바람 쐬기를 끝내면/ 옷 털어 다시 입고 세심정으로 걸어 올라가네’

2곡은 냇물이 흘러오다 잔잔한 소를 이루는 굽이다. 이상정은 논어에 나오는 증점의 고사를 인용해 목욕하고 바람 쐬기를 마치면 바위 위에 널어놓았던 옷을 털어 입고 세심정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푸른 절벽 마주하는 사이에 고인 물 깊고/ 운무가 아침저녁으로 평지 숲 가려 어둑하네/ 한가로운 마음으로 높은 대 위에 올라 앉으니/ 천 년 지나도록 누가 알겠는가 산속에 사는 이 마음’

3곡 유연대는 2곡에서 1㎞ 정도 물길 따라 내려가면 물줄기가 부딪히는 쪽에 20~30m 높이의 수직 절벽이 길게 버티고 있는 곳이다. 절벽 아래 형성된 소는 맑고 넓고 깊다. 3곡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3곡시는 주자의 무이도가 중 5곡시와 운자가 같고 내용도 비슷하다. 이상정의 ‘산심(山心)’과 주자의 ‘만고심(萬古心)’은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고심은 성인의 마음이다. 3곡의 그림을 보면 심연은 맑은 못이라는 징담(澄潭)으로 표현했고, 취병(翠屛) 위에는 유연대가 있다.

‘물 맑고 산 깊은 곳에 한 마을이 있는데/ 텅 빈 서재에 온종일 사립문 닫고 사네/ 물가에 조는 새와 계단에서 웃는 꽃/ 향 한 자루 피워 놓고 말없이 앉아 있네’

4곡 고산정사를 노래하고 있다. 3곡에서 300m 정도 내려가면 물줄기가 또 크게 휘돌기 시작하는 굽이에 이른다. 이 굽이의 물가 언덕에 고산칠곡의 중심 공간인 고산정사가 있다. 정사 뒤로는 이상정이 별세한 후 1789년에 제자들이 그를 기려 세운 고산서원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고산정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맞은편 미천 건너의 암봉인 제월봉이다. 이 제월봉 벼랑에는 측백나무 3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252호로 지정된 이 ‘안동 구리 측백나무숲’ 측백나무는 수령이 100~200년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심춘대 아래 냇물 질펀하게 흘러가는데/ 우뚝 솟은 절벽 위 고원(古院)은 텅 비어있네/ 한 줄기 무지개 다리 나루터를 가로질렀으니/ 누가 힘들였나 냇물 건너게 한 그 공덕’

5곡 심춘대는 3곡에서 1.3㎞ 정도 내려가면 나오는 완만한 물굽이 지점이다. 높이 50~60m에 이르는 퇴적암 벼랑이 있다. 이 심춘대 위는 공무로 출장 오는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숙소인 옛 원(院)이 있던 터다. 이상정 생존 당시에도 원은 이미 없어졌던 모양이다.

홍교는 보통 아치형으로 쌓은 돌다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나무로 놓은 섶다리를 말한 것 같다. 고산칠곡도를 보면 튼튼한 섶다리가 그려져 있다. 섶다리는 처음에는 푸른색이었다가 솔가지나 나뭇잎이 말라가며 점차 다양하게 색깔이 바뀌고 모양도 무지개처럼 둥글어서 ‘홍교’라고도 불렀다. 그는 이 다리를 보며 다리를 놓기 위해 애썼을 백성들의 노고에도 따스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끊어진 산록 길게 뻗어 옥병풍처럼 둘렀는데/ 잡초 우거진 돌밭 사이 버려진 정자가 있구나/ 성색(聲色)에는 관심 없어 관리하는 사람도 없는데/ 텅 빈 산은 예전대로이고 냇물은 절로 맑구나’

6곡 무금정은 5곡에서 800m 정도 아래 지점이다. 미천은 이 굽이에서 급하게 휘돌아 흐르는데, 이곳에 50~60m의 수직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절경이라 지금도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이 적지 않게 찾는다. 이상정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무금정이 버려진 채 방치되고 있었다.

‘넓은 들 트인 산에 평평한 냇물뿐/ 숲 너머 울타리로 저녁 연기 피어오르네/ 기이한 유람 다하는 곳 다시 머리 돌리니/ 항아리 같은 협곡 별천지가 있구나’

7곡 무릉리를 읊고 있다. 6곡에서 1.5㎞ 정도 물길 따라 더 내려가면 무릉리가 나온다. 절벽 사이를 흐르는 미천이 곳곳에 소와 담을 이루며 흐르다가 이곳에서 들판을 만나 평범한 냇물로 바뀌는 굽이다. 주위에 평지가 펼쳐지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무릉리다. 이상정은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지명을 지닌 이 굽이에서 고산칠곡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이 마을 이름은 물줄기가 산부리를 돌아 흘러 들어가므로 ‘무른개’라 불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무릉(武陵)이 되었다고 한다.

이상정은 해 질 녘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을 묘사하며 이곳이 이상향인 무릉도원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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