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신화와 역사의 땅 .4] 호국의 성지

  • 조진범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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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24   |  발행일 2018-04-24 제24면   |  수정 2018-06-15
위기에 빠진 나라 구하려 분연히 일어난 호국·독립운동의 성지
1592년 왜군침략하자 불교 승병 모집
동화사는 영남지역 승병 본부 지휘소
부인사 대구유림 중심 최초 의병결성
전국 의병장 105명 모여 팔공산 회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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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산성(사적 제216호) 남문과 성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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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통일대불전 뒤에 보관돼 있는 비사리구시(나무로 만든 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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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봉서루 뒤쪽에 걸린 ‘영남치영아문’ 현판. 이 현판은 사명대사가 임진왜란때 지휘한 승군 본부가 동화사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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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군부대 주변에 남아 있는 공산성 성벽. 성벽이 많이 훼손돼 그 규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팔공산은 호국의 중심지였다.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왜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과 승병들이 호국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축성된 산성도 살펴볼 수 있다. 가산산성이다. 호국의 기운을 품고 있는 성벽이 지금도 굳건히 서 있다.

◆호국불교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왜군의 침입에 제대로 대비하지 않은 탓이다. 왜군은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경상도를 휩쓸었다. 조선의 지휘관과 관리들은 달아나기 바빴다. 싸움이 되질 않았다. 민초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국가의 방어막이 무너지자 백성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핍박을 받았던 불교도 백성들을 위해 승병을 일으켰다. 동화사는 사명대사 유정이 이끄는 승병의 지휘소가 됐다. 사명대사가 팔공산 일대에서 활약한 때는 1595년 무렵이다. 동화사 성보박물관에는 사명대사의 인장인 ‘영남도총섭인(嶺南都總攝印)’과 승군을 지휘할 때 불었던 소라나팔, 나무로 만든 밥통인 비사리구시가 보관돼 있다. 동화사 봉서루 뒷면 벽에는 ‘영남치영아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영남치영아문은 영남지역 승병 본부 출입문이라는 뜻이다. 또 성보박물관에는 사명대사 진영(보물 제1505호)도 있다. 전국에 있는 20여개의 사명대사 진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1796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보박물관은 동화사가 호국의 성지임을 증명하는 문화재로 가득하다. 조선시대 고난을 받았던 불교계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스스로 군사를 일으켰다. 한국 불교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명대사가 팔공산 일대에서 활동한 것은 대구의 유학자 채응린의 아들 채선견이 쓴 ‘부인사 중창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였던 사명대사는 의승도대장으로 평양성과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고,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돼 조선인 포로 3천500여명을 무사히 귀국시키기도 했다. 동화사에 들르면 호국불교의 위상을 반드시 점검해보기를 권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아픔과 그 아픔을 이겨내려는 스님들의 의지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1592년 왜군침략하자 불교 승병 모집
동화사는 영남지역 승병 본부 지휘소
부인사 대구유림 중심 최초 의병결성
전국 의병장 105명 모여 팔공산 회맹

가산산성은 우리나라 유일한 삼중성곽
팔공산 초입에는 ‘삼충사 묘정비’건립
사명대사 진영 등 당시의 흔적 전해져

팔공산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 성지
동화사 학승들 덕산정서 만세운동 주도


◆임란 의병의 본거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3개월 뒤 대구의 유림을 중심으로 부인사에서 최초로 의병이 결성됐다. 당시 의병대장은 낙재 서사원이었다. 서사원은 ‘낙재일기’에 “사람들이 모여 모두가 의병장이 없는 것을 근심하였다. 보잘것없는 나에게 정상사(정사철)를 대신하라는 첩자를 내었으므로 나는 사양했지만, 부득이 그것을 맡았다”라고 적었다. 이듬해에는 ‘공산의진군’이 조직됐다. 또 임란 발발 4년 뒤인 1596년 도체찰사 류성룡의 지시로 영남지역에 거주하는 의병장이 공산성에서 회맹을 했다. 팔공산 회맹은 6개월 뒤 다시 열렸는데, 전국 16개 지역에서 105명의 의병장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임진왜란 당시 팔공산이 영남 의병들의 활동 중심지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삼충사 묘정비’도 팔공산 초입에 있다. 파계사로 연결되는 지묘동 대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세명의 충신’은 최인, 최계, 최동보이다. 경주최씨일가 삼충(三忠)인 최인, 최계, 최동보 삼숙질(三叔姪·삼촌과 조카)이 임란에 혁혁한 전공을 수립한 업적을 찬양한 충의사적비다. 세사람 모두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최동보의 ‘우락재일기’에는 “무쇳덩이 200근을 모으고, 대장장이에게 명하여 긴 창과 큰 칼 300여자루를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곡식 800여섬을 모아 굳게 간직해두었다”고 적혀 있다. 왜군이 아직 팔공산권으로 침략하기 전의 일기다. 대구 유학자의 나라사랑과 선견지명을 짐작할 수 있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을 겪고 만들어진 성이다. 해발 901m의 가산에 쌓은 석축산성이다. 사적 제216호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내성과 중성, 외성을 갖춘 삼중성곽이다. 가산산성이 만들어진 배경을 생각하다보면 전란의 아픔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진다. 가산산성은 6·25전쟁 때 다시 등장한다. 1950년 8월 북한의 남침을 가산산성에서 저지했다. 국군과 미군은 가산산성 전투에서 승리해 대구를 방어할 수 있었다. 가산산성 동문에 오르기 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복수초 군락지를 만나게 된다. 팔공산의 소중함을 또한번 깨닫게 되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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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 부처’로 더 알려진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31호).

◆독립운동의 성지

임진왜란 당시 승병과 의병의 본거지였던 팔공산은 일제강점기 대구 독립운동의 성지였다. 동화사가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1919년 3월30일 대구 덕산정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투사가 바로 동화사 지방학림(현 동화사 승가대학) 학승들이었다. 동화사 학승들은 독립만세운동 이틀 전인 3월8일 대웅전 옆 심검당(尋劒堂)에 모여 만세운동 동참을 결의했다. ‘심검’은 지혜를 찾는 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동화사 학승들은 거사 하루 전 동화사 포교당이던 보현사 김상희의 집에 숨어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승병을 일으켰던 사명대사의 정신을 계승한 동화사 학승들이다. 덕산정 만세운동을 주도한 동화사 학승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돼 10개월의 실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팔공산 동화사에는 구한말 의병투쟁의 역사도 담겨 있다. 대구 진위대에 5년 동안 재직한 독립운동가 우재룡 선생이 동화사에 본부를 둔 채 7개월에 걸쳐 일본군과 유격전을 펼쳤다.
글=조진범기자 jjcho@yeongnam.com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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