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뒷방 늙은이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8-03-21   |  발행일 2018-03-21 제29면   |  수정 2018-03-21
[기고] 뒷방 늙은이
안병렬 중국 연변과학기술대 전 교수

열살쯤 되었을까. 외가에 갔더니 외할머니와 작은외할머니 두 분이 안방에서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며 얘기를 하고 계셨다. 옆에서 들으니 이 안방을 빨리 며느리에게 내어주라는 작은외할머니의 얘기를 외할머니께서 심각하게 듣고 계시는 것이었다. 한참만에 외할머니가 “그래야지” 하시는데 그 말에 힘이 빠져 있었다. 무슨 항복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시 어린이들의 놀이 가운데 둘이 겨누다 지는 편에서 “고상”하면 내가 졌다는 항복으로 끝이 나는 놀이가 있었다. ‘고상’은 항복을 뜻하는 일본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어린아이같이 외할머니는 “그래야지”라고 하셨다. 안방과 건넌방을 바꾸는데 왜 항복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단순히 거처를 바꾸는 게 아니라 주부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었다. 더구나 외가는 10대가 넘는 종가였다. 그 종부의 실권 자리를 넘겨주고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는 의례라 그리 쉽게 호락호락 넘기랴. 그러나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외할머니도 긴 담뱃대 그대로 물고 건넌방으로 물러가셨다. 이제 뒷방 늙은이가 되신 것이다.

뒷방 늙은이는 아무런 실권이 없다. 그저 며느리 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마땅치 않아도 참아야 한다. 제동을 걸면 집안이 시끄러워진다. 그러면 다들 뒷방 늙은이 탓만 한다. 늙은이가 참아야지, 늙은이가 져야지 한다. 사실 그래야 집안이 화평해지는 것이다.

요즘 나는 뒷방 늙은이로 자처하며 살아간다. 맏놈 가족과 같이 살며 그저 하자는 대로 하고 며느리가 주는 대로 먹는다. 내 주장이 거의 없다. 내 연금으로 내가 내 멋대로 쓰기에 부딪칠 일은 거의 없다. 이 돈으로 손자놈에게는 물론 며느리에게도 조금 선심을 쓰고 큰소리치며 산다. 하지만 그들의 가사에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 알려고도 않고 만고에 편하다. 뒷방 늙은이로도 편하게 산다는, 그리고 뒷방 늙은이 모시고서도 화목하게 산다는 모범을 보여 준다고나 할까. 아들 가족은 몰라도 나로선 편하게 자족하며 산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며칠 전이다. 손자놈이 느닷없이 제 차에 타란다.

“아니 네가 언제 차 샀어?”

“할아버지 모르셨어요? 벌써 한 주간이 지났는데.”

순간 나는 허탈하였다. 이놈은 좀 전까지도 심심하면 용돈을 얻어가던 놈이다. 그런 놈이 지난 봄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더니 벌써 차를 샀다는 것이다. 기특한 일이긴 하나 평생 처음으로 차를 사면서도 나에게 알리지 않았다니 괘씸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였다. ‘나는 뒷방 늙은이인데’하며 자위를 하였으나 그 섭섭함은 좀체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참기로 하여 입을 다무는데 이놈이 먼저 말을 건다. 결혼을 하고 집을 장만하여야 하는데 7천만원만 도와달란다.

“(뻔뻔한 놈이구나) 임마, 내가 어디 그런 많은 돈이 있어?”

“할아버지가 전에 제주도에 오피스텔 하나 사주신다 했잖아요?”

말은 맞다. 전에 그놈이 제주도에서 의경으로 근무할 때 “제주도에 취직하면 오피스텔 하나 사 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내심 거기 내가 가서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이대며 조르는 것이다. 그 배짱 하나는 좋다고 여겼다. 그래도 어이 그리 호락호락 허락하랴.

“임마. 그건 그때고 더구나 지금은 제주도가 아니잖니?” 그러면서 ‘이 자식, 차를 사면서도 말 한 마디 없던 놈이 집 사는 데는 왜 돈 달라는 거냐’는 말이 곧 입밖으로 나오려 하는데도 참았다. 뒷방 늙은이는 그 지위를 수용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기에 참은 것이다.

뒷방 늙은이 노릇 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그래도 내 돈 갖고 있으니 이 대접이라도 받지 만에 하나 아내의 병원비며 내 용돈까지 아들이나 며느리에게 타서 쓴다면, 나아가 손자놈에게 용돈이라도 한 푼 얻어 쓴다면 내 꼴이 어떠랴. 그렇지 않은 내 처지에 참으로 감사하며 드디어 손자놈에게 얼마를 주기로 선심을 썼다. 그러고 보니 다른 두 손자놈에게도 그 정도 주어야 하니 오늘부터 나는 허리끈을 졸라매어야 한다. 아니 허리끈으로는 어림도 없다. 아예 일찌감치 집 팔 작정을 해야 한다. 이게 뒷방 늙은이 신세인가. 뒷방 늙은이 노릇 하기도 그리 쉽지는 않은가 보다.
안병렬 중국 연변과학기술대 전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