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15] 영천 횡계구곡(上)...횡계 산천 사랑한 두 형제…차갑고 맑은 물에 ‘세속 티끌’ 씻어내다

  • 김봉규
  • |
  • 입력 2018-03-08 08:04  |  수정 2021-07-06 14:53  |  발행일 2018-03-08 제22면
20180308
횡계구곡 중 3곡에 있는 태고와(太古窩). 정규양이 1701년에 지은 누각으로 횡계 바위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두 형제는 태고와 앞 홍류담에서 뱃놀이를 하기도 했다.

횡계구곡은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의 횡계(橫溪)에 설정된 구곡이다. 조선시대 학자인 훈수 정만양(1664~1730)·지수 정규양(1667~1732) 형제가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에 만들어 경영한 구곡이다. 두 형제의 호인 훈수(塤)와 지수()는 훈과 지라는 악기 이름에서 따왔는데, ‘훈지’는 형제간의 지극한 우애를 비유하고 있다. 두 사람은 영남 사림으로 퇴계학을 존숭했지만, 여러 다른 학자들과 교유하며 지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윤증(1629~1714), 정제두(1649~1736) 등이다. 두 사람은 이처럼 폭넓은 교유를 통해 학문에 정진, 여러 분야에 두루 정통하게 되니 당시 사람들은 중국 송나라의 정호·정이 형제와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들은 벼슬을 하지는 않고 고향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하는 길을 택했다. 당시는 노론이 집권하고 있어 남인이 벼슬을 하는 것이 어렵기도 했다. ‘세상 풍파를 알지 못하고(世路風波也未知)/ 깊숙한 골짜기 한 곳에 우연히 깃드네(一區林壑偶棲遲)/ 시냇가에 바위 있어 낚싯대 드리우고(溪頭有石堪垂釣)/ 구름 밖 산이 많아 시를 읊조리네(雲外多山詠詩)/ 때로 절의 누각에 이르니 승려 말 부드럽고(時到寺樓僧語軟)/ 매번 차 주전자 기울이니 병든 몸에 마땅하네(每傾茶碗病軀宜)/ 날씨 개 창가에서 많은 책 다시 대하니(晴窓更對書千卷)/ 태고의 흉금은 복희에 있어라(太古胸襟在伏羲)’. ‘훈지양선생문집(塤兩先生文集)’에 있는 시 ‘술회(述懷)’이다. 두 사람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정만양·정규양 형제가 만든 구곡

정만양·정규양 형제가 언제 횡계구곡을 설정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횡계구곡에 옥간정(玉磵亭)과 태고와(太古窩)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들이 지어진 후에 설정되었을 것이다. 태고와는 정규양 나이 35세(1701) 때 지었고, 옥간정은 50세(1716) 때 건립했다. 그렇다면 횡계구곡은 정규양의 나이 50세 이후에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35세에 횡계의 경치를 사랑해 대전리의 집을 옮겨 횡계에 거처를 정했다. 먼저 5곡의 와룡암 위에 집을 짓고 육유재(六有齋)라는 편액을 달았다. 정규양 나이 40세 때 정만양이 가족을 이끌고 횡계로 찾아와 동생과 작은 집에서 함께 거처하면서 강론을 했는데, 간혹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낚시를 하며 서로 즐거운 삶을 살았다.

구곡이 있는 횡계는 보현산에서 비롯된 시내로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했으나, 상류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지금은 물이 많이 흐르지 않는다. 대부분 암반으로 이루어진 시내로, 청송에서 흘러오는 옥계(玉溪)가 만나 자을천(玆乙川)이 된다.


영천 대전리서 학문 몰두 정규양
경치에 빠져 육유재 짓고 옮겨와
5년후 형 만양 가족과 함께 거처
벼슬 않고 은거하며 후학 강론도
자연 관장 즐거움에 ‘구곡’ 설정



‘산천을 관장하며 성령을 즐기는데(管嶺溪山樂性靈)/ 차갑게 흐르는 아홉 굽이 그 근원은 맑네(寒流九曲一源淸)/ 한가로이 찾아오니 미친 흥 주체할 수 없어(閒來不奈顚狂興)/ 천년 전 뱃노래 망령되이 이어보네(妄續千年櫂下聲)’

문집에 있는 횡계구곡시의 서시다. 두 형제는 횡계의 산과 내를 거닐며 성정을 닦았다. 횡계의 차갑고 맑은 물에 세속의 티끌을 씻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그 즐거움에 빠져 1천년 전 주자가 무이구곡에서 읊었던 무이도가를 외람되게 한 번 흉내 내어 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구곡시 제목도 ‘주자의 무이도가의 운을 감히 사용해 횡계구곡시를 짓는다’는 의미의 ‘횡계구곡감용회암선생무이도가십수운(橫溪九曲敢用晦菴先生武夷櫂歌十首韻)’으로 정했다.

‘일곡이라 배처럼 생긴 너럭바위 앉은 곳에(一曲盤巖坐似船)/ 두 시내가 합해 한 내를 이루네(雙溪合始成川)/ 도원은 진실로 산 높은 곳에 있거늘(桃源政在山高處)/ 다만 숲은 깊고 푸른 안개에 덮여 있네(只是林深幕翠烟)’

1곡 쌍계(雙溪)를 읊고 있다. 쌍계는 옥계와 횡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 널따란 바위가 있는데 배 모양을 하고 있는 반암이다.

주자가 배를 타고 무이구곡을 유람한 사실로 인해, 조선의 선비들도 실제 배를 타고 유람할 수 없는 구곡에서도 구곡시를 읊으면서 배를 타고 올라 유람을 시작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횡계구곡시도 1곡에서 배 모양의 바위를 거론하며 구곡유람을 시작하고 있다.

횡계와 옥계가 만나 자을천을 이루는데, 두 형제는 옥계를 신계(新溪)라고 불렀다. ‘시내는 두 원류가 있으니 첫째는 횡계라 하고, 둘째는 신계라 하니 공암(孔巖) 아래에서 합류한다.’

형제는 이 굽이에서 무릉도원이 횡계가 시작되는 산의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구곡 유람을 시작한다. 그러나 구곡의 극처는 숲이 깊고 안개에 덮여 있어 그곳에 이르기는 쉬운 일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이곡이라 물결은 잔잔하고 봉우리 늘어서 있어(二曲潺湲列數峰)/ 공암 바위 빛은 유난히 빼어난 모습이네(孔巖巖色別修容)/ 산허리에 길이 걸려 그윽하고 빼어난데(山腰路卦添幽絶)/ 인간세상 돌아보니 몇 겹이나 막혔던가(回首人間隔幾重)’

2곡은 공암(孔巖)이다. 쌍계에서 600m 정도 횡계를 따라 올라간 지점에 있다. 시냇가 바위가 구멍이 많이 나 있어 공암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공암에 살고 있는 이무기가 이 바위 구멍을 통해 산 너머 계곡으로 흐르는 옥계를 오갔다고 한다. 공암 앞의 산이 이남산(尼南山)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문집을 보면 2곡의 공암은 단순한 구멍 바위가 아니라 공자를 상징하는 바위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지은 시 ‘아니산(阿尼山)’이다.

‘이산은 만고에 우뚝한데(尼山萬古立)/ 그 아래 공암이 있네(其下孔巖存)/ 후학은 다만 우러러보기만 하고(後學徒瞻仰)/ 문하에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네(還嗟未及門)’

횡계구곡에서 공암은 일반적인 바위가 아니라 학문에 정진하는 후학들이 바라보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도록 한 공자 바위로 설정한 것이다.

현재의 공암은 도로를 내면서 많이 파손되어 아랫부분만 남게 되었다.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는데, 옛날에는 횡계 가에 공암이 높이 솟아 있고, 뒤로 이남산이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3곡 태고와는 정규양이 1701년에 건립한 누각

‘삼곡이라 깊은 제방 배를 띄울 만하고(三曲深堤可汎船)/ 움집 중 태고와는 몇 년이나 되었는가(窩中太古是何年)/ 진수재의 일은 모름지기 서로 힘쓰는 것이니(進修一事須相勉)/ 많은 영재들 나는 가장 아낀다네(多少英才我最憐)’

3곡 태고와이다. 제방은 홍류담을 말한다. 홍류담 가에 세워진 정사가 태고와이다. 지수가 35세 되던 해인 1701년에 건립한 누각이다. 본래 태고와라 했는데, 1730년 제자들이 개축한 뒤 모고헌(慕古軒)이라 불렀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사방에 툇간을 두른, 독특한 정사각형 평면구조이다. 중앙에 작은 방이 있다. 이 누각 뒤에는 1927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횡계서당이 있다.

두 사람은 이 시의 주석에 ‘제3곡은 태고와(太古窩)와 진수재(進修齋)가 있다’고 적고 있다.

태고와 앞의 홍류담은 물의 깊이가 제법 깊어 당시에는 배를 띄울 만했다. 그래서 실제 두 사람은 이곳에서 배를 띄우기도 했다.

‘8월에 작은 배가 비로소 이루어지니 대체로 서당 제군의 힘이다. 16일 밤에 산의 달이 매우 밝아 시험 삼아 제군과 더불어 배를 띄우고 홍류담에서 노닐며 뱃머리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니 생각이 초연하여 율시를 읊어서 제군에게 사례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 이미지

김봉규 기자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