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명절, 잘보내셨습니까

  • 장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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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20   |  발행일 2018-02-20 제30면   |  수정 2018-02-20
어릴 적 명절은 설렘의 대상
사회 각박해지며 의미 퇴색
귀찮고 번거로워 외면하고
정마저 사라지면 고립 필연
서로 보듬는 계기로 삼아야
[화요진단] 명절, 잘보내셨습니까
장준영 편집국 부국장 겸 사회부문 에디터

설 연휴 마지막 날 라디오로 접한 감동적인 사연 하나. 택배일을 하는 아들로부터 벨트를 선물받은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아들은 낡고 헐거워진 아버지의 구닥다리 벨트가 언젠가부터 내내 눈에 밟혔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명품벨트는 엄두도 못냈지만, 그래도 남들이 봤을때 그럴듯한 벨트를 사드리고 싶었다. 산더미 같은 배송물량과 씨름해야 하는 시기여서 직접 뵙지도 못한 채 잠시 들러 벨트만 두고 나왔다.

아버지는 돌돌 말린 벨트를 한참이나 봤다고 했다. 돌이켜보니 여느 집 자식들처럼 많이 가르치지도 못했고 알뜰살뜰 잘 챙겨준 기억도 많지 않았다. 항상 바빴고 앞만 보며 달려온 사이, 부쩍 커버린 아들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 고마워 가슴 뭉클했다. 해준 것이 별로 없어 평생 짠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아들이 울컥하게 만든 것이다. 아버지는 이번 설 명절에 세상을 허리춤에 찰 수 있는 값진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어릴 적 명절은 늘 기다림의 대상이었다. 제수를 장만하고 이런저런 체면까지 생각해야 하는 부모님들의 노고나 걱정과는 상관없이 그냥 즐거웠다. 평소 자주 접하기 어려웠던 먹거리가 많아서 신났고 한참 떨어져 지냈던 친구나 친척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설날 세뱃돈은 그 시절 어림없었던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주요한 재원이었고 웬만하면 꾸지람도 피해갈 수 있는, 말 그대로 명절이었다.

어른들은 그때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듯 울거나 웃으며 주고받았다. 누구 집 농사가, 누구 집 자식들이 잘됐다는 등의 소재도 단골메뉴였다. 부러워하면서도 시기하지 않았고 부족한 대로 현실에 수긍하며 내일을 꿈꾸는 긍정의 힘이 강했다. 남 탓을 별로 하지 않았던 덕분에 진심어린 덕담을 주고받으며 헤어질 수 있는, 그래서 정을 느끼고 에너지를 얻는 소중한 날이기도 했다.

그랬던 명절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순기능보다 역기능에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마음을 무겁게 한다. 가족과 일가친척을 반갑게 만났던 명절이 언젠가부터 없던 싸움도 생기고 곪았던 부분이 터지는 날로 바뀌고 있다. 다툼의 주제도 다양한데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호전적이다. 시가나 처가로 출발하기 전에 치른 1라운드는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부터 더 거친 싸움으로 확대되기 일쑤다.

이럴 거면 왜 모이느냐는 회의론이 고개를 든다. 확산 강도가 마치 마약 같다. 만나서 얼굴 붉히는 것보다 영혼없는 인사치레로 보내는게 낫다는 말도 들린다. 명절이 싫은 이유도 제각각이다. 시가·처가에서의 대우나 태도는 물론 부담스러운 관심과 비아냥 섞인 비교 등 저마다 할 말이 많다. 전부 자기 이야기만 한다. 내 눈의 티끌이 남의 눈 대들보보다 더 아프니 이해해달라는 식이다.

누군가 역할을 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가치가 명절인데 너무 쉽게 평가절하되는 현실이 두렵기도 하다. ‘조상을 잘 둔 후손들은 명절을 해외에서 보내고 반대의 경우는 기름냄새 맡아가며 찌짐을 굽는다’는 자조적인 푸념도 등장한다. 끈끈한 정이 엷어질수록 합리로 포장된 이기(利己)만 휑하니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모두 가르치려 드는 세상이다. 자기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전부 잘못됐거나 그르다고 우긴다. 부모세대는 정녕 못배워서 어른을 공경하고 자식을 위해 헌신했을까. 명절을 명절답게 보내려면 한 발 물러설 수도, 참을 수도 있어야 한다. 부부든 부모자식·형제자매 간이든 절연(絶緣)이 분명 보통 일은 아니다. ‘안 보면 되지’라고 툭 내뱉는 경망스러운 단어 선택이 무섭다.

인생의 멋진 일은 대부분 후반부에 일어난다는데 적금이나 보험 드는 심정으로 배려와 희생에 투자해보기를 권해본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는 말은 항상 옳다. 주지 않고 받으려만 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직역하면 ‘세 사람이 길을 걸어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로,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살펴 스스로 고쳐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명절도 이 잣대로 재해석해보면 어떨까. 장준영 편집국 부국장 겸 사회부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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