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타임] ‘불’과 대통령

  • 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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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19   |  발행일 2018-02-19 제30면   |  수정 201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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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아떨어졌다. 역대 대통령 취임 전 어김없이 큰 불이 난 것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고,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 전에도 불이 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도 BH(청와대)에 입성하기 전 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전에는 아주 큰 불이 났다. 2003년 2월18일 일어난 대구 지하철 화재다. 이 전 대통령 취임에 앞선 2008년 2월10일엔 숭례문이 불탔고, 박 전 대통령 땐 2013년 2월17일 서울 인사동 먹자골목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문 대통령이 취임하기 나흘 전인 2017년 5월6일에는 강릉 일대에서 대형 산불이 났다.

지나고 보니 좋지 않은 징조였다. 우선 노 전 대통령은 서민의 대통령을 표방하며 당선됐다. 지하철은 서민의 발이다. 노 전 대통령은 부자 증세를 통한 서민 복지를 강조했지만, 결국 서민도 세금 폭탄을 비켜갈 수 없었다. 전 정권이 물려준 외환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에 충실했지만 비정규직은 양산되고 일자리는 고갈됐다. ‘88만원 세대’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집집마다 아들·딸·손자·손녀의 취직 걱정이 늘어져 서민의 ‘우환(憂患)’이 됐다. 서민의 발인 지하철이 불에 탄 게 불길한 징조였을까.

이 전 대통령은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제1공약으로 내세워 권좌에 올라 이를 다소 축소한 4대강 사업을 벌였다. 밀레니엄 시대에 토목공사가 통한 셈이다. 숭례문은 국보 1호다. 역사의 상징물이다. 그러나 즉위식도 열리기 전 불에 탔으니 뭔가 불길했다. 돌이켜보면 이 전 대통령은 역사를 거꾸로 돌린 측면이 있다. 4대강 사업으로 온 나라가 토목 공화국이 됐다. 토목업을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MB 정권 당시 개발도상국에서나 주력하는 토목공사가 국정의 핵심 과제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다 MB 정권은 유신시대에나 있을 법한 민간인 불법사찰까지 자행했으니,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린 것과 진배없다.

인사동에선 박 전 대통령 취임 여드레 전 화염이 치솟았다. 서울시내 그 많은 동네 가운데 하필 인사동이었다. 인사동과 결부 짓는 건 무리지만 ‘수첩 공주’의 ‘수첩 인사’는 현실이 됐다. 임기 내내 박 전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게 바로 인사 난맥상이다. 결국 쫓겨나다시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든 것도 어찌 보면 사람을 잘못 썼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취임 전 불은 애써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석할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35일 간격으로 제천과 밀양에서 잇따라 발생한 화재는 모두 79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182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참사로 각인되고 있다. 설을 앞두고는 삼척에서 큰 산불이 나더니 연휴 기간 전국 곳곳이 산불로 몸살을 앓았다.

툭하면 불이 나자 극단적인 보수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이 주로 모이는 사이트에선 ‘문재앙’(문재인+재앙)이란 단어가 노골적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대통령 취임 전 발생한 화재를 두고 정권을 평가하는 건 논리의 ‘비약’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국민이 힘들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노·이·박 전 대통령은 지나간 과거지만 문 대통령은 현재고 미래다. 그만큼 잘못된 게 있으면 바로잡고, 우려가 나오면 개선의 여지가 있다. 대구 지하철 화재 15주기를 맞는 날, 이 칼럼을 쓰면서 먼 훗날 ‘국민을 편안하게 했던 대통령’을 기대해 본다.

진식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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