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그때 그 골목의 아이들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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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09 07:51  |  수정 2018-02-09 07:51  |  발행일 2018-02-09 제16면
[문화산책] 그때 그 골목의 아이들Ⅱ
백운선<연극배우>

범진이(가명)를 만난 건 5년 전 우리 동네 ‘ㄴ지역아동센터’(이하 센터)에서다. 처음 센터장으로부터 연극수업 요청을 받고 찾아가 보니 극단 연습실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센터 아이들도 평소 길을 오가다 마주쳤던 얼굴이었다. 그 아이들 속에 범진이가 있었다. 범진이는 나를 보자마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선생님, OO내과 4층에 살죠”라고 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저는 우리 동네 모르는 곳이 없거든요, 히히.” 놀라운 녀석이었다.

그날 범진이에게 강한 인상을 받고 나는 연극프로그램을 ‘동네탐방’으로 결정했다. 아이들과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이야기를 모아서 연극을 만드는 것이었다. 봄에는 날씨가 너무 좋다며,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사주겠다며, 가을엔 바람이 좋다며 아이들을 일으켜 동네를 돌아다녔다. 아이들과 나는 동네 풍경을 사진으로 찍기도 하고, 그림으로 지도도 만들고,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가 돌아와서 흉내내기도 했다. 때로는 동네 미용실, 슈퍼, 기름집 같은 곳에 찾아가 사장님과 손님들 인터뷰도 했다. “정말 이렇게 하면 연극 만들 수 있어요?” 하고 걱정스럽게 묻던 아이들이 어느새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로 연극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범진이는 항상 친구들이 지칠 때마다 “연극시간 아니면 이런 거 언제 해보겠노?”라며 제법 의젓하게 아이들을 북돋웠다. 겨우 열한살 어린이가 어떻게 저런 어른스러운 말을 쓰고 배려를 갖고 있는지 늘 궁금했다. 어느 날, 센터에서 연극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범진이가 집이 아닌 시장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궁금해서 뒤따라가 물었더니 장을 봐서 집으로 가야 한단다. 워낙 의젓한 아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나중에 센터장에게 듣기로 범진이는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데 할머니가 몸이 편찮으셔서 웬만한 집안일은 다할 줄 아는 아이라고,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아이가 밝은 걸 보면 할머니가 사랑을 많이 주시는 것 같다고…. 나는 갑자기 가슴을 뭔가로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나와 아이들이 함께 만든 연극은 그해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발표했다. 센터장의 든든한 후원으로 아이들에게 멋진 의상을 입혔고 난생처음 분장이라는 것도 하고 행사장에 조명기 몇 대를 설치해 제법 그럴싸한 무대 위에서 공연을 했다. 부모님과 친구, 주변 이웃, 센터에서 초대한 다양한 손님, 우리 극단 단원이 초대되어 아이들의 연극을 관람했다. 범진이의 할머니도 곱게 화장하고 범진이의 연극을 보러 오셨다. 범진이를 비롯한 센터 아이들이 직접 만든 연극에는 어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세상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관객은 아이들이 대견해서 혹은 마음이 아파서 울고 웃었다. 백운선<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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