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대구 .16 끝] 신천변 침산의 절경, 침산만조

  • 임훈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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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30   |  발행일 2018-01-30 제13면   |  수정 2018-01-30
황홀하게 장엄하게…침산, 노을에 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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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북구 침산 침산정에서 바라본 해넘이 풍경. 조선 전기의 유학자 서거정은 ‘침산의 저녁 노을’을 ‘대구십영’의 하나로 꼽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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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 정상부에는 ‘침산만조’라고 적힌 바위와 침산정이 자리하고 있다. 침산은 북구 주민들의 휴식처로 다양한 체육시설과 산책로 등이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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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에서 내려다본 신천과 신천대로 전경. 정체된 차량들과 가로등이 뿜어내는 불빛이 신천대로를 가득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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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북구 침산동. 신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 하나가 있다. 침산(砧山·121m)이다. 다듬이돌을 닮아 ‘침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으며, ‘점산’으로 불렸다고도 전해진다. 5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오봉산’으로도 불리운다. 현재 침산에는 시민 휴식을 위한 다양한 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침산공원에는 인공폭포와 더불어 돌계단과 산책로를 비롯해 족구장과 배드민턴장 등의 체육시설까지 조성돼 산책하거나 운동 중인 시민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침산만조, 대구십영 마지막 경치
봉우리 5개…오봉산이라 하기도
대구분지 중앙 위치 조망에 제격
금호강 뒤 팔공산 봉우리들 보여

대구읍성 철거한 친일파 박중양
별장 침산장 만들어 근거지 삼아



#1. 침산에서 대구를 내려다보다

침산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드넓은 대구분지 중심부 인근에 위치해 있어 주변을 조망하기에 좋다. 침산 맞은편 연암공원의 낮은 봉우리를 제외하고는 주변에 거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침산 정상부에 조성된 침산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장쾌하기 그지없다. 침산에서는 대구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신천 주변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와 도심지역을 굽이굽이 돌아나온 신천이 금호강과 합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천·금호강의 합류처 너머로 시선을 향하면 팔공산 봉우리들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겹쳐져 장엄한 풍광을 연출한다. 비로봉과 동봉을 지나 초례봉까지 이어지는 팔공산의 거대한 산세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남쪽으로는 어머니 품처럼 대구를 끌어안은 앞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그 오른편으로는 비슬산이 고개를 빼곡히 내밀고 있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납작하게 엎드린 용의 형상이 드러난다. 와룡산이다. 와룡산 오른쪽으로는 금호강이 흐르고, 강 너머 구미 금오산의 형상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어른거린다.

밤을 맞은 침산은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해가 지면 침산정과 그 주변에 야간 경관조명이 켜지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조명으로 단장한 침산정은 단청의 색상이 또렷이 드러나고 건물의 모양새까지 입체적으로 드러나면서 낮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선사한다. 침산정 주변 원형 산책로에 설치된 LED조명 기둥 또한 자주색과 파란색 등으로 색깔을 바꾸며 침산의 밤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침산에서 바라본 대구도심의 밤풍경도 인상 깊다. 침산 북쪽을 지나는 경부고속도로는 차량 불빛으로 거대한 빛의 물줄기를 만들어낸다. 고속도로와 신천대로를 잇는 서변대교 역시 도심으로 진입하려는 차량 불빛으로 가득 찬다. 또한 정체된 차량이 뿜어내는 붉은 브레이크등으로 물든 신천대로, 도심 곳곳에 솟아오른 고층빌딩에서 퍼져나오는 각양각색의 불빛은 화려한 도시의 밤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2. 대구십영의 대미를 장식하다

침산은 조선시대에도 대구의 경관을 감상하는 명소 중 한 곳이었다. 대구 출신의 조선 전기 유학자 서거정(徐居正)은 대구의 아름다운 풍광 10곳, 즉 ‘대구십영(大邱十詠)’의 마지막인 제10경으로 ‘침산만조(砧山晩照), 침산의 저녁 노을’을 꼽았다. 대구십영은 ‘금호강의 뱃놀이’ ‘팔공산의 눈 쌓인 풍경’ 등 대구의 절경을 읊는 칠언절구의 한시다. 500여년 전 대구를 찾은 서거정은 침산 아래로 붉게 지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그 절경에 탄복했다. 이후 조선시대 사람들은 대구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야기할 때마다 대구십영과 침산을 떠올렸을 것이다. 시에 등장하는 산머리가 침산이며 산머리에 이른 물은 지금의 신천이다.

물은 서쪽에서 흘러들어 산머리에 다다르고(水自西流山盡頭 수자서유산진두)

푸른 침산에 맑은 가을빛 어리었네(砧巒蒼翠屬秋 침만창취속청추)

해질녘 바람에 어디서 방아소리 급한고(晩風何處舂聲急 만풍하처용성급)

사양(斜陽)에 물든 나그네 시름만 더하네(一任斜陽搗客愁 일임사양도객수)

침산만조에 등장하는 침산의 해질녘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전해준다. 침산에 올라 해넘이를 보고, 그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며 지평선으로 향할 때마다 대구분지는 시시각각 다른 색깔옷을 바꿔입으며 어둠을 맞이한다. 겨울철의 경우 와룡산 용머리 부분의 정상부 근처에서 해가 넘어간다. 승천을 기다리는 용이 해의 정기를 받아먹는 형국이다. 서거정이 침산에 올랐을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대구도심 풍경일 것이다. 지금은 도심 전체가 건물과 도로로 메워져 있지만, 서거정이 침산에 올랐을 당시의 주변 풍경은 거칠 것이 없는 평원과 몇몇 구릉뿐이었을 것이다.

현재 침산 정상부의 침산정 앞에는 한자로 ‘침산만조’라고 적힌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바위 한 편에는 서거정의 침산만조가 한문으로 새겨져 있으며, 반대편에는 시조학자이자 사학자인 노산 이은상이 번역한 ‘침산만조’가 한글로 적혀있다.


#3.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가 깃든 곳

침산에는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다. 침산 일원은 친일행적으로 악명을 떨친 일제강점기 관료 박중양(1872~1959)의 근거지였다. 침산에는 박중양의 별장인 침산장(砧山莊)이 자리했는데, 침산장의 면적은 현재 침산공원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박중양은 늘 작대기를 휘두르며 다녔기에 ‘박작대기’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1943년에는 자신의 친일 행적을 미화하기 위해 침산에 일소대(一笑臺)를 세웠지만 1996년 철거됐다.

박중양은 전형적인 친일파다.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한 엘리트였지만, 조국이 아닌 일본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러·일 전쟁 때 일본군 통역을 담당하며 외세의 침략에 힘을 보탰다.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창씨개명 훨씬 전인 유학시절부터 ‘야마모토’라는 일본 이름을 즐겨 사용했다. 박중양은 대구읍성 파괴에도 앞장섰다. 경북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를 지내던 1906년 대구읍성을 무단 철거했다. 읍성 때문에 상권 확장에 나서지 못하는 일본인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에는 애국지사 탄압에 앞장서는 등 반민족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으며, 조선총독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박중양은 광복 후인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됐지만 처벌받지 않았으며 끝까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았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 기획: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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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정 맞은편 바위에는 서거정이 침산에서 바라본 저녁 풍경을 노래한 한시 ‘침산만조’가 한문으로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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