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대구 .15] 신천변 방천시장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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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25   |  발행일 2018-01-25 제13면   |  수정 2018-01-26
아이들 놀이터·여인들 빨래터이던 신천변에 피란민 몰려 시장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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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교 인근 고층건물에서 내려다본 방천시장 전경. 방천시장은 광복 이후 신천 제방을 중심으로 형성됐으며, 한때 ‘대구 3대 시장’으로 꼽힐 만큼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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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천시장 인근 김광석 길을 찾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시장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1964년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난 김광석은 어린 시절 방천시장에 자리한 아버지의 가게에서 음악을 들으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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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천시장 골목에 자리잡은 옛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방천시장이 위치한 신천변 일원은 광복 이후 대구에 터를 잡은 전재민들의 정착지 중 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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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에는 회화나무와 소나무가 약 600m에 걸쳐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선 느티나무와 팽나무 고목은 장엄의 깃발과 같았다. 물은 맑아 언제나 헐벗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고 물고기를 잡고 지치면 나무 그늘에 누워 쉬었다. 물은 쉼 없이 흘러 언제나 아녀자들의 빨래터였다. 아침 일찍 집채만 한 빨랫감을 이고 온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말리기를 반복하며 종일을 천에서 보냈다. 천변에는 솥이나 드럼통을 놓고 장작불을 피워 빨래를 삶아주는 장사치도 있었다. 어둠이 내리면 신천은 사람들의 목욕장이 되었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가장들은 어둠 속에서 몸을 씻고 더러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신천의 모습이다.

수성교·신천 제방 언제나 북적
6·25 후 도처에서 몰린 피란민
장사 시작하며 시장 점점 확대
60년대엔 대구 3대시장에 꼽혀
재개발지역 지정되고 쇠락거듭

김광석길 조성 후 화려한 재기

#1. 오래전 방천시장

물은 또한 길이었다. 신천 제방은 대구의 남북을 이었다. 소년들은 제방 길을 따라 가창으로 가 연료로 사용할 송진을 채취하거나 솔방울을 주웠다. 수성교는 이미 1927년 준공되어 작게는 천의 동서를 잇고 크게는 인근 지방의 동서를 이었다. 수성교와 신천 제방은 사방에서 들고 나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 돌아온 전재민(戰災民)들이 사람 많은 신천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시작했다. 수성교 남쪽 제방을 따라 삼덕동 대구형무소 죄수들의 노역장인 채소밭과 벽돌 굽는 공장이 있는 삼엄한 지대를 멀찍이 내다보는 곳까지 약 500m에 걸쳐 장터가 형성되었다. 시장은 ‘신천제방을 따라 터를 잡았다’ 하여 방천시장이라 불렸다. 산짐승들이 주변의 밭을 파헤치고 주막집의 가축을 물어가던 시절이었다. 시장은 복잡하고 무질서했다. 상인들은 꾀를 내어 새끼줄을 이용해 ‘井’자 모양으로 땅을 구획해 시장을 정리해 나갔다. 그리고 천막을 친 점포에서 쌀과 소금, 식재료 등을 도매로 팔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신천 제방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피란민들의 판잣집이 물샐틈없이 들어섰다. 도처에 알아듣기 힘든 이북 사투리가 질펀했고 사람을 찾는 광고판을 몸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흔했다.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정훈 엄마와 정훈이 말숙이를 찾습니다. 정훈엄마는 귀 밑에 점이 있고….’ ‘1·4 후퇴 때 헤어진 어머니 조춘미를 찾습니다. 목에 큰 점이 있고 다리가 불편하고….’ 광고판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방천시장은 북새통이었다. 피란민들은 방천시장을 터전으로 하루하루를 살았고 그에 따라 시장은 더욱 활발히 커져갔다. 1960년대부터 방천시장은 특히 싸전과 떡전으로 명성을 얻었다. 호남·나주·익산 등지에서도 곡물이 올라와 판매되었고 경산·고산·청도의 주민들까지 방천시장을 이용했다. 그 시절 방천시장은 1천개가 넘는 점포가 두부공장·콩나물공장 등과 함께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서문시장·칠성시장과 함께 대구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2. 소년들

온 나라가 전쟁의 화염에 휩싸여 있던 때, 방천시장의 북새통을 뚫고 달리던 열네 살의 소년이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납치되어 안 계셨고 형들은 군에 입대한 상황에서 소년은 가족의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가장이었다.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소년이 지인의 소개로 얻게 된 일은 신문팔이였다. 하루에 100장을 팔아야 소년의 네 식구가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신문을 받아 든 소년은 곧장 방천시장으로 달려갔다. 중간에서는 한 장도 팔지 않았다. 방천시장에는 사람이 많았고, 중간에 몇 장을 파느라고 다른 사람에게 그 좋은 장소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소년은 신문을 파는 사람들 중에서 항상 가장 먼저 방천시장에 도착했다. 항상 1등이었다. 그러나 1등으로 도착한다고 해도 그 시장을 독차지할 수는 없었다. 소년은 조금이라도 더 팔기 위해 호주머니에 잔돈을 잔뜩 넣어 다니며 거스름돈을 챙기는 시간을 줄였다. 나중에는 신문을 먼저 던져주고 돌아 나올 때 느긋하게 신문 값을 받기도 했다. 때때로 신문 값을 떼이기도 했지만 소년은 신문을 다 파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다른 신문팔이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렇게 소년은 방천시장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 비상한 소년이 바로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이다. 그는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어느 분야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한 번 도전했으면 반드시 으뜸이 되어야 한다는 나의 신념은 방천시장의 신문팔이 시절에 이미 생겼는지 모르겠다”고 회고했다.

방천시장이 가장 번성했던 1960년대, 시장 한편에 자리했던 ‘번개전파사’에는 아버지 곁에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 기울이던 소년이 있었다. 가수 김광석이다. 1964년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게에서 그는 음악을 들으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1969년에는 방천시장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시장에서 가방가게를 하던 아버지는 고교야구의 광팬이었고, 가게 옆에서 숙식을 하고 시장에서 뛰놀던 소년은 자라 야구선수가 됐다. 영원한 삼성 라이온즈의 전설, ‘양신’ 양준혁 선수다. 소년들이 성장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동안 세상도 방천시장도 점차 변해갔다.

#3. 오늘의 방천시장

1970년대 후반 달구벌대로와 신천대로가 뚫렸다. 80년대 말에는 주변으로 백화점 등 대형유통업체가 들어섰다. 동시에 도심의 아파트 개발붐이 일면서 슈퍼와 마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방천시장은 점점 축소되었고, 신천대로의 높다란 옹벽 아래 납작하게 엎드려 섬처럼 고립되어 갔으며, 결국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상인들은 하나둘 시장을 떠났다. 남은 점포 수는 60개도 채 되지 않았다. 사람 떠난 점포는 빈 상태로 방치되었고 음습한 골목은 우범지대가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쇠락해가던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09년.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시장 활성화 대책이 나온 이후부터다. 중구청과 방천시장 상인들, 인근 주민들, 그리고 지역 예술가들이 힘을 모았다. 1차 사업인 ‘별의별 별시장’ 예술프로젝트를 시작으로 2차 사업인 ‘문전성시’가 이어졌다. 시장 안 비어있던 가게에 지역 예술인들이 둥지를 틀었고 ‘시장’과 ‘예술’은 상생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공공예술작업을 통한 시장 환경 개선이 추진되었다. 오래된 가겟집을 단장하고 판매물품과 매대를 정리했다. 고객 쉼터와 어린이 놀이 공간 등 서비스 공간도 확보했다. 작가들은 빈 점포를 작업장으로 또는 전시장으로 변화시켰다. 화가, 조각가, 조명연구가, 디자이너, 설치미술가, 공예가, 카툰 작가, 사진가, 음악인 등 문화 예술계의 무수한 사람들이 동참해 쇠락한 시장에 예술의 옷을 입혔다. 신천대로 옹벽 아래 방치된 길은 ‘김광석 길’이 되었다. 회색 담장은 김광석의 노랫말과 기억으로 가득 찼다. 쌈지 공원이 조성되었고 야외공연장이 들어섰다. 2015년에는 골목방송 스튜디오가 문을 열었고 최근에는 김광석의 유품을 전시하고 음악을 듣는 공간인 ‘김광석 스토리하우스’가 개관했다.

현재 주말 평균 5천명 이상이 방천시장을 찾아온다. 방문객은 유모차를 탄 아기부터 지팡이 쥔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오늘의 방천시장은 우리에게 오래 익숙한 전통시장의 모습은 아니다. 국지성 호우처럼 벼룩시장과 프리마켓이 열리고, 버스킹이 흔하며, 시장통 가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여전히 쌀가게, 생선가게, 건어물집 등이 자리하고 있다. 먹거리·살거리·볼거리와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통째 하나인 곳, 지금의 방천시장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 기획: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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