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오 인장 이야기 .4] 32세 연상 淸 문인이자 서화가 양보광과 나이 떠난 교유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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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24 08:11  |  수정 2018-01-26 11:35  |  발행일 2018-01-24 제23면
양보광 작 ‘추도강남(秋到江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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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보광서화인’ 인장.

석재 서병오의 인장 중 각별히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양보광서화인(楊光書畵印)’이다. 서병오가 사용한 인장은 아니지만 서병오가 중국을 주유(周遊)하던 시절 상하이에서 머물며 교유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인 양보광(楊光: 1830~1912)의 인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로 2.3㎝ 세로 2.2㎝ 정도의 정사각형 인장이다. 산수화에 특히 뛰어났던 그의 작품에 사용한 인장으로 추정된다.

상하이 천심죽재 머물며 포화·오창석 등
당대의 대표 해파 화가들과 문묵 교류
서병오에 ‘양보광서화인’ 선물로 준 듯
석재는 詩를 지어 탁월한 능력에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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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해파(海派) 서화가들과 교유한 서병오

서병오는 두 차례에 걸쳐 9년 정도 중국(청나라)을 주유했다. 1898년부터 1902년까지와 1909년부터 1912년까지다. 서병오는 중국 주유 시절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으나 주로 상하이에 머물며 당대의 대표적 서화가들과 어울렸다.

당시 상하이는 새로운 화풍을 형성한 화가들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19세기 중엽 상하이는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새로운 회화시장으로 부상했고, 부근의 장쑤성과 저장성 일대의 직업화가들을 끌어들였다. 당시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던 화가들을 해파(海派)라고 불렀다. 해파 화가들은 대중적·현실적 표현기법, 다양한 색채 사용, 서양화기법 접목 등을 통해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했다.

서병오는 1898년 애제자 긍석(肯石) 김진만(1876~1934)과 함께 청나라로 건너가게 된다. 이때 1902년까지 5년 정도 상하이·쑤저우 등을 주유하며 많은 유명 예술가와 정치인 등을 만나 교유했다. 중국 주유는 서병오의 능력을 중국 지식인들에게 드러내는 기회가 되기도 했지만, 자신의 서화작업에도 큰 변화를 주면서 한층 더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서병오는 1차 중국 주유에 이어 1908년 말 한 번 더 중국을 여행하게 된다.

서병오는 당시 중국 망명생활을 하며 머물던 민영익의 대저택 천심죽재(千尋竹齋)에 주로 머물렀다. 상하이의 천심죽재는 민영익이 상하이의 유명 서화가들과 교유하던 공간이었고, 서병오는 천심죽재를 중심으로 당대의 대표 작가인 포화(蒲華)를 비롯해 오창석(吳昌碩), 서신주(徐新周), 오추농(吳秋農), 황산수(黃山壽), 하조백(何照伯), 양백조(楊伯調) 등과 문묵으로 교류했다.

포화가 서병오를 위해 1909년에 휘호해 선물한 묵죽도와 행서 작품, ‘석재는 한묵향(翰墨香)을 소장하니 신축년(1901) 7월이다. 민영익이 천심죽재에서 보배로 즐겼던 것이다. 포화가 명(銘)하고 서신주가 각(刻)했다’라는 글이 새겨진 벼루 ‘충석유방’ 등이 해파 작가들과의 각별한 교유를 말해주고 있다.

양보광도 이들과 함께 서병오가 상하이에서 교유한 인물이다.

◆상하이 서화가 양보광의 인장인 듯

양보광은 현재 상하이시 외곽의 송강(松江) 지역 출신으로 자가 고온(古)이다. 지방의 수령 벼슬을 한 문인이자 서화가인 그는 청나라 덕종이 통치하던 광서(光緖) 시대(1875~1909)에 저장성 경녕(景寧)현의 수령인 지현(知縣) 벼슬을 지냈다. 산문·시·사(詞)에 두루 유명했으며 문집 ‘소암집’을 남겼다. 예원서화선회(豫園書畵善會) 회장 등을 역임한 그는 학문에 해박했으며 산수화에 특히 일기(逸氣)가 있었다. 만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상하이에서 서화를 팔며 생활하기도 했다.

양보광과 서병오의 각별한 교유관계는 서병오가 양보광이 쓴 시의 운자를 사용해 화답한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병오의 시 ‘양고온의 원운에 화답하다’는 제목의 칠언율시 네 수(和楊古原韻四首) 중 일부다.

‘화당에 새긴 글은 영웅임을 드러내니(華堂金石照人雄)/ 선생에게 옛 풍모 있음을 알겠도다(已認先生有古風)/ ~사귄 정은 젊고 늙은 관계를 잊기에 충분하고(交情自合忘衰少)/ 이 세상 함께하니 국내외의 경계가 필요하겠는가(幷世何須界外中)/ 근래 나라에서 어진 이를 부르는 조서가 자주 내려오니(近報徵賢頻下詔)/ 반계에 머물며 주나라를 돕는 공을 기다려 보리라(潘溪留待贊周功)’

‘~마음 가는 대로 붓을 휘두를 때는 비바람 몰아치듯 하고(筆陣橫時落風雨)/ 시단에서는 가는 곳마다 고수(高手)들을 쓰러뜨렸네(吟壇到處偃旗旌)/ 백발에도 아직 장대한 뜻 사라지지 않고(白髮未能消壯志)/ 황금은 저절로 고결한 사람을 두려워하는구나(黃金自是畏高情)/ 유공은 쓸쓸한 생애였으나 끝내 무슨 한이 있으랴(庾公蕭瑟終何恨)/ 사와 부로 사방 좌중을 놀라게 하였으니(詞賦當年四座驚)’

서병오는 양보광의 인품과 작가로서 탁월한 능력 등에 대한 찬사를 보내면서 자신보다 32세 연상인 양보광과 나이를 떠나 각별한 정을 나누었음을 노래하고 있다. 시에 나오는 유공(庾公)은 남북조 시대의 대표적 시인 유신(庾信)인데, 양보광을 유신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인장은 양보광이 서병오에게 선물로 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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