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울산 방어진 슬도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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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19   |  발행일 2018-01-19 제36면   |  수정 2018-01-19
바람도, 파도도 거문고 소리를 내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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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도와 1958년에 설치한 슬도등대. 섬은 120만 개의 구멍과 파도가 거문고 소리를 낸다.

방어진 버스 터미널에 내리면 2층 정도의 높은 건물들이 번화가를 이루고 있었다. 거리에는 차려입은 젊은이들과 어부들이 활기차게 엉켜 있었고 경양식집의 반투명 유리 너머로는 연인들이 보였다. 가겟집들이 벅적하게 늘어선 상가 모퉁이길에는 바나나 빵을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바나나 모양의 틀에 반죽을 붓고 계란 하나를 깨어 넣고 노랗게 구워 낸 빵. 그것으로 손과 마음을 녹이며 가까운 바다로 향했다. 그렇게 20대의 몇 년간 겨울이면 방어진을 찾았었다.


방어진항 동진방파제 끝자락의 무인도
섬 전체 120만개 구멍 숭숭 뚫린 곰보섬
거문고처럼 구슬픈 소리 낸대서 ‘瑟島’

동진방파제 시작되는 곶 언덕 성끝마을
층층이 파란 지붕들과 200m 벽화골목
소리체험관에선 울산 ‘소리 9景’ 감상


◆방어진

바다로 가는 길은 쉬웠다. 상갓길 지나 INP 조선소 담벼락을 따라 나아가면 곧 바다였다. 조선소 자리는 1929년 방어진에 세운 ‘방어진 철공소’가 있던 자리다. 그곳을 근대적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소로 보는데, 본격적으로 엔진 제작을 통한 동력어선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방어진 철공소는 1930년대 말 200명 이상의 직공을 거느린 조선 최대의 조선소 중 하나로 성장해 지역 경제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후 1960년에 청구조선공업사로 바뀌었다. INP중공업으로 바뀐 것은 1999년이다. 2007년에는 세광중공업으로 변경되어 명맥을 유지하다 2012년 파산했다. 지금 조선소 자리에는 대규모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 뒤로 넘어질 듯 고개를 젖혀야 꼭대기가 보인다. 감각은 길을 잃고 바다를 찾아 헤맨다. 세상에! 옛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위압적인 오피스텔 일대를 지나자 조금씩 눈에 익은 길이 나타난다. 수협 위판장 옆 건물이었을 게다. 그곳 1층에 창 넓은 다방이 있었다. 늙은 어부들이 정물처럼 앉아 있는 그곳에서 몇 시간이고 바다를 보곤 했었다. 두리번두리번하지만 쉬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바다가 느껴진다. 킁킁 물고기 냄새를 포착했다. 방어진은 ‘방어가 많이 잡히는 나루’다. 울산 동부 최대의 어업 전진기지로 고려시대부터 왜적의 침입이 잦아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1921년에는 울산 최초로 전기가 공급됐다. 1923년에는 동해안 최초의 방파제가 들어섰다. 지금의 서방파제다. 나는 방어진항의 동쪽 끝 곶으로 향하고 있다. 거기에는 동진방파제가 있다.

◆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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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도에 닿기 전 뒤돌아본다. 슬도교 너머는 고래 조형물, 멀리 보이는 것은 소리체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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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도에서 다시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방파제 끝에 빨간 등대가 자리한다.
방어진항 동쪽 곶에서부터 동진방파제가 뻗어나간다. 그것은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무인도 슬도(瑟島)로 향한다. 섬은, 거문고처럼 구슬픈 소리를 낸다고 해서 슬도다. 방파제는 고래와 조개와 해초와 문어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외항의 거대한 테트라포드는 군데군데 색을 입었다. 커다란 고래 조형물이 하늘을 향해 로켓처럼 서있다.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 가운데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새끼 업은 고래’를 형상화했다. 방파제는 슬도교 다리로 이어진다. 기잉 기잉 다리가 소리를 낸다. 안전상의 문제로 펜스의 접합 부위를 용접하지 않은 듯하지만 꼭 일부러 바람 소리를 잡는 것 같기도 하다. 기잉 기잉, 기이한 바람 소리.

슬도는 섬 전체가 구멍 뚫린 바위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곰보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구멍은 120만 개다. 아무도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섬은 퇴적된 사암으로 구멍은 조개류 따위가 파고들어가 살면서 생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파도가 구멍 속을 드나들 때마다 거문고 소리가 난단다. 그것을 ‘슬도명파(瑟島鳴波)’라 한다. 귀를 기울인다. 무작스러운 바람이 거문고 소리를 지운 걸까. 슬도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섬 한가운데 1950년대에 세운 하얀 무인등대가 서 있다. 등대에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거문고 소리다.

섬에서부터 다시 방파제가 뻗어 나간다. 방어진항을 감싸듯, 서방파제를 향한다. 방파제 끝에는 방어와 고기잡이하는 어부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빨간 등대가 있다. 내항의 석축 아래에는 낚시꾼들이 점점이 서 있다. 이따금 은빛 학꽁치가 파닥거리며 잡혀 오른다. 그들의 고요한 부동 너머로 공업도시 울산의 위용이 솟아 있다. 방어진항과 고층 아파트들이 잔뜩 들어서 있는 시가지, 그리고 우뚝 솟은 크레인들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커다란 배가 내항으로 들어선다. 낚싯줄이 하늘을 가르는 소리, 갈매기가 낚시꾼의 미끼통을 탐하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 두르릉 하는 소리. 이것인가. 섬의 소리가. 아주 약간의 쇠 맛을 가진 현의 울림이 들린다. 이것이 슬도의 소리인가.

◆성끝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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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끝마을에는 벽화골목이 조성되어 있다. 일명 향수바람길이다.
동진방파제가 시작되는 곶의 나지막한 언덕은 ‘성끝마을’이다. 슬도에서 바라보면 파란 지붕들이 층층이 쌓인 작은 마을이다. 마을의 동북쪽 너머는 지금 대왕암 공원이다. 옛날 조선시대에는 그 일대에 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목장을 둘러싼 울타리를 마성(馬城)이라고 했는데, 울타리의 끝부분이 바로 ‘성끝’이다.

성끝마을에는 벽화골목이 조성되어 있다. 일명 ‘향수바람길’로 섬끝슈퍼에서 시작해 200m 남짓 이어진다. 집들은 파스텔 색이다. 무성한 동백나무 궁륭이 입구인 집도 있고, 싱그러운 동백나무가 담인 집도 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지키는 순둥이 개도 만나고, 파란 지붕 너머로 방어진항도 보인다. 인적은 드물고, 빛은 많고, 바람은 잠잠하고, 골목은 곱다.

성끝마을 앞에는 소리체험관이 들어서 있다. 현대중공업의 엔진 소리, 마골산의 숲 바람 소리, 주전해변의 몽돌 소리, 슬도명파 등 울산의 ‘소리 9경’을 들어볼 수 있다. 내용은 적지만 전망이 멋지다. 슬도 바다가 한눈이다. 청년 다섯 명이 바람을 뚫고 방파제를 걸어가고 있다. 어깨에 낚싯대를 멘, 씩씩한 출사다. 바다와 오후와 친구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충만이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향으로 가다 언양 분기점에서 울산선을 타고 울산IC에서 내린다. 울산 이정표를 따라 시내로 진입, 신복로터리에서 좌회전해 삼호교를 건너 우회전, 태화강변을 따라 방어진으로 간다. 이정표와 도로 바닥의 방어진 표시를 따르면 쉽다. 소리체험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체험관 내 카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운영된다. 매월 둘째, 넷째 월요일, 설과 추석 당일은 휴관한다. 입장료는 어른 1천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5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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