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오 인장 이야기 .2] “가르침 바랍니다” 전각의 대가 김태석도 印章 3개 선물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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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10 08:01  |  수정 2018-01-26 11:36  |  발행일 2018-01-10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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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김태석이 새긴 서병오 인장(아래쪽), 김태석이 새긴 인장을 사용한 서병오 작품(秋塘書巢) 일부. 인장을 새긴 1932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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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개된 서병오 인장 중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성재(惺齋) 김태석(1875~1953)이 새긴 인장 3개다. 17개 인장 중 이 세 개만 측관(側款)이 새겨져 있어 인장을 새긴 사연과 시기, 새긴 사람을 알 수 있고, 또한 인장을 새긴 사람이 당대의 대표적 전각가이자 서예가이기 때문이다.

세 개로 이뤄진 인장 세트인 ‘徐氏丙五之印(서씨병오지인)’ ‘石齋七十以後作(석재칠십이후작)’ ‘壽而康(수이강)’이다. 앞의 두 인장은 정사각형 인장이고, 나머지 하나는 세로로 긴 인장이다. ‘오래 평안하게 살다’는 의미의 ‘수이강’은 작품 머리 부분에 사용하는 두인(頭印)이다. ‘수이강’은 두인의 글귀로 종종 사용되고 있는 문구다.

근대 한국 전각계 대표하는 서예가
38세에 중국 총통 원세개 옥새 제작
석재, ‘추당서소’ 등 작품에 인장 써
김태석과 나눈 교유 연구 절실해


◆김태석이 1932년에 새긴 인장 세트

‘徐氏丙五之印(서씨병오지인)’ 인장의 4개 옆면에 걸쳐 새겨진 측관을 보면 누가 언제 어떤 연유로 새겼는지가 담겨 있다. 한문으로 새긴 글귀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모하던 끝에 선생이 계신 곳에서 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해 주시기를 옛 지인처럼 하시니 매우 감동하였습니다. 길이 생각해주시길 바라면서 졸렬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인장을 새겨서 석재 선생께 드립니다. 보시고 가르쳐주십시오. 임신년(1932년) 겨울 성재 작(慕仰之餘 獲拜 軒下 愛之如舊知人甚感爲其永念 不顧拙劣而上奏刀 以呈 石齋先生 法鑑 壬申冬 惺齋 作).’

이 내용으로 보아 김태석이 1932년 겨울에 서병오가 머물던 유마시루(維摩詩樓)를 방문해 새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石齋七十以後作(석재칠십이후작)’과 ‘壽而康(수이강)’ 인장에는 각기 한쪽 옆면에 같은 글씨체로 ‘惺齋 作(성재 작)’이라고 새겨져 있다. 같은 시기에 한꺼번에 새겨준 것임을 알 수 있다.

1932년은 서병오가 만 70세가 되던 해다. 서병오는 성재 김태석이 새겨준 인장 세트를 즐겨 사용한 것 같다. 드러난 서병오 작품 중 이 인장들을 사용한 것을 여러 점 확인할 수 있다.

추당여사에게 준 ‘추당서소(秋塘書巢)’ 작품을 보면 낙관 글씨에 71세에 쓴 것으로 적고 있는데, 성재가 인장을 새긴 해에 찍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두인을 비롯해 3개의 인장이 찍혀 있다. 이와 함께 ‘송석군(松石君)’(송석은 석재 친구 이종면의 아들 이근상)에게 써준 초서 작품, 당호로 써준 ‘미암(美庵)’ 등이 있다. 주로 누군가를 위해 휘호한 작품에 사용한 듯하다. 그런 작품들이 ‘수이강’이라는 두인 글귀가 잘 어울리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이 인장들이 사용된 작품들은 휘호를 한 시기가 표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1932년 이후의 작품임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김태석은 당대 전각의 대가

서병오의 인장을 새긴 김태석은 위창 오세창과 더불어 근대 한국 전각계의 쌍벽을 이룬 전각가이자 서예가이다. 그는 각 서체에 능했지만 특히 전서에 뛰어났다. 전각에도 전념해 ‘한국의 등석여(鄧石如)’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등석여는 청나라 전각의 대가다. 성재는 중국 베이징을 중심으로 15년(1908~1923) 동안 청나라에 체류하면서 전각에 전념, 3만여 과(顆)에 달하는 공사인(公私印)을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38세 되던 해인 1913년에는 당시 중화민국의 총통(總統)이었던 원세개(袁世凱)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국무원 비서직으로 있으면서 그의 옥새(玉璽)를 비롯해 많은 인장을 새겼다.

그의 글씨 작품 중 하나로 합천 해인사 홍제암 부도밭의 사명대사비(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가 있다. 1947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한학자이자 법률가인 변영만(변영로 형)이 비문을 짓고, 김태석이 글씨를 썼다. 비석 이름 전서는 오세창이 썼다.

그의 인예(印藝) 특색은 선대(先代)의 많은 전각들이 측관을 남기지 않은 반면, 측관을 남겼다는 점이다. 청년시절부터 중국을 왕래하며 습득한 결과의 산물이다. 김태석의 인흔(印痕)은 ‘남유인보(南遊印譜)’ ‘동유인보(東遊印譜)’ ‘성재재중전각인영집(惺齋在中篆刻印影集)’ ‘원세개총통사장인집(袁世凱總統私章印集)’ ‘중화각부현인문집(中華各府縣印文集)’ ‘청유인보(淸遊印譜)’ ‘수명루인보(水明樓印譜)’ 등 여러 인보에서 볼 수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경산 하양에 묻혔다는 기록이 있는 김태석과 서병오가 어떤 교유를 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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