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대구 .9] 동화천변 연경서원 <상> 대구 최초의 서원을 세우다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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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04   |  발행일 2018-01-04 제13면   |  수정 2018-01-26
智子樂水의 땅 동화천변 연경서원…대구유학 르네상스 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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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서원은 1565년 대구 유림들에 의해 건립된 대구 최초의 서원으로 유학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하지만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했고 서원이 들어선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다. 학계에 따르면 동화천변 화암이 있는 동구 지묘동 대원사 일대가 연경서원 자리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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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때 발간한 대구읍지에는 연경서원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나온다. 읍지에는 ‘연경리 화암 아래에 서당을 지어 생도들을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고 매암 이숙량이 쓴 기문도 자세하게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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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왕건은 이곳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들었다. 천년도 더 전에, 견훤과의 전투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풀벌레들과 강물마저 숨죽인 산골 마을에는 어둠 속 천체의 빛 아래 책 읽는 소리만이 낭랑했다. 그는 행여 방해가 될까 살금살금 걸으며 ‘열심히 연경(硏經)하는구나!’라고 감복했다. 훗날 그가 들었던 소리는 그 마을의 이름이 된다. 팔공산 아래 동화천변의 연경이다. 그로부터 600여 년 뒤에는 그곳에 대구 최초의 사립학교가 세워진다. 그것은 숙명인지도 모른다.

#1. 연경에 학교를 세우다

조선시대 서원이 처음 세워진 것은 16세기다. 과거에 집착하거나 명예나 이익을 좇기보다는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학문을 닦고 후진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것이 서원이었다. 성균관과 향교가 공립학교라면, 서원은 사립지방학교라 할 수 있었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에 제사 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하고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는 구실을 했다. 최초의 서원은 조선 중종 37년인 1542년에 세워진 영주의 백운동서원이다. 그 후 해주의 문헌서원, 함양의 남계서원, 영천의 임고서원, 경주의 서악서원, 성주의 영봉서원 등이 연이어 건립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대부분 서원 지방 수령이 건립
대구는 지역 유림 자발적 참여
1563년 착공해 1565년에 완공
사당 없이 제사보다 교육 집중
전경창·채응린·정사철 등 강학
당시 학적부엔 제자 137명 기록
지역선비들, 왜란땐 의병 조직
30년만에 소실돼 1602년 중건
1871년‘철폐령’ 후 재건 못해



1563년 대구에서도 글방에 모여 공부하던 지역의 선비들이 서원 건립을 논의하고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서원이 지방 수령의 주도로 설립된 데 반해 대구의 서원 건립은 지역유림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던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과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이 주도하는 가운데 지역의 선비들이 돈과 곡식, 베(布) 등을 출연했다. 그리고 알맞은 땅을 골랐다. 동화천변 풀이 우거진 들판이었다. 대구부사는 서원의 부지를 관 소유의 땅과 교환해 마련해 주었다. 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위에 마을이 있으니 지묘이고, 아랫마을은 무태다. 서원 건물이 그 사이에 자리하니 마을 이름이 연경이다.’

명종 18년인 1563년 공사가 시작되었다. 중앙에 정남향의 강당 인지당(仁智堂)이 세워졌다. 논어의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에서 취한 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 앞 좌우로 동재 보인재(輔仁齋)와 서재 시습재(時習齋)가 건립되었다. 긴 회랑 가운데에 남문인 초현문(招賢門)을 세우고 그 서쪽에 동몽재(童蒙齋)를 두었다. 동몽재의 동쪽 두 칸은 양정재, 서쪽 세 칸은 유학재라 했다. 이 외에 애련당(愛蓮堂)과 유정(柳亭), 부엌과 창고 등 여러 부속 건물들을 설치했다. 착공 2년 만인 1565년 대구 최초의 서원이 완공되었다. 그리고 이름하기를 땅의 이름을 따 ‘연경서원(硏經書院)’이라 하였다.

창건 당시 연경서원 건물은 모두 40여 칸이었다. 사당은 없었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연경서원은 제사보다는 교육에 중점을 두고 건립되었다. 전경창과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 등이 강학을 맡았다. 이들은 대구가 배출한 대표적 인재들로 지역 유학의 르네상스를 연 선구자로 이름이 높았다. 이들로부터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태암(苔巖) 이주(李), 연정(蓮亭) 류요신(柳堯臣) 등이 배움을 얻었다. 이들은 스승을 이어 강학하게 되는데 연경서원의 학적부라 할 수 있는 통강록에 따르면 그들의 제자는 137명에 이른다. 실로 연경서원은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를 이끌었고, 이 시기가 대구 유학의 중흥기였다.

대구 유학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중시하는 퇴계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것은 선비가 추구하는 삶의 최고 목표를 자신의 도덕적 인격 완성에 두었고, 나아가 서로 보고서 착하게 되고 서로 도와서 이루는 것, 즉 사회적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다.

#2. 임진왜란의 선봉에 선 선비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해 7월6일 팔공산 부인사에서 대구 전역의 선비들과 의병 조직을 아우른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이 결성되었다. 이때 63세의 큰 스승인 정사철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 3월 정사철이 병으로 타계하자 서사원이 의병대장을 승계했다. 그는 대구읍내 7개 이(里)와 3개 현(縣)을 20개 지역으로 분할하고 향병장과 의병대장 등을 두어 대구 전 지역에 의병을 조직했다. 동화사의 관군과 협력해 왜적과 싸웠으며 정유재란 때는 군량을 운반하기도 했다.

서사원의 뒤를 이은 의병대장은 손처눌이다. 그는 전쟁 중에 양친을 잃었는데 전후 예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부모의 무덤 아래 영모당을 짓고 평생 시묘하였다고 한다. 곽재겸은 해안현 5면 도대장으로 활동하며 병사와 장정 모집, 양식 확보, 요충지 방비 등에 여러 계책을 마련했다. 류요신은 해안현의 북촌 의병장, 정광천은 하빈현 남면의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이주는 처음으로 창의의 논의를 발한 인물로 공사원(公事員)에 임명돼 사무를 맡았다.

이숙량은 전쟁이 터진 그해 74세나 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10월의 진주성전투에 참전했다가 진중에서 타계했다. 채응린과 전경창은 임란 발발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왜적과 맞서 싸우는 일에 적극 나섰다. 대구의 의병장들은 대부분 연경서원에서 강학을 펼친 전경창, 정사철, 채응린의 제자들이었다.

#3. 소실과 재건

연경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세워진 지 30년 만에 한 줌 재만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선조 35년인 1602년 이주, 서사원, 손처눌, 곽재겸 등이 서원의 중건에 나섰다. 맨 처음 애련당을 세웠다. 폐허 속에 선 애련당은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과 같았을 것이다. 당시 53세이던 서사원은 애련당 중건의 감격을 시로 남겼다.

‘내가 이수(달성군 이천)에서 부들 같은 돛을 달고 배를 타고 올라 와/ 화전(畵田, 화암 아래)에 닻줄 매고 화암정사(연경서원)로 들어 왔네/ 당(堂)은 애련당부터 먼저 작게 지었는데/ 재(齋)에는 잡초가 무성해 아직 다 베어내지 못했네/ 초현문과 양정당은 간절하지만 못 지어 이름만 남아 있고/ 몽매한 사람들을 깨치려니 나의 평범한 자질이 부끄럽네/ 늘그막에 거듭 찾으니 감개가 무량한데/ 바라건대 장차 한가한 날 서책을 보내리라.’

이후 1613년이 되어서야 연경서원에 사당이 처음 건립되었다. 한강 정구가 서원 뒤 언덕에 올라 사당 지을 터를 확정했다. 먼저 이황을 모셨고, 1622년에는 정구를 함께 배향했다. 이후 1706년에 대구부사를 지내며 대구향교와 연경서원에서 직접 강학을 했던 우복 정경세를 추가 배향했다. 1635년에는 사당 옆에 향현사(鄕賢祠)를 지어 전경창을 배향하고 이후 1707년 이숙량을 추가로 모셨다.

인조 23년인 1645년에는 본 강당인 인지당(仁智堂)을 건립했고 1660년에는 사액을 받았다. 1774년에는 수재로 사당을 40보 동쪽으로 이건하고 동재와 서재를 지었으며 그 이듬해에 양정헌(養正軒)과 기타 부속 건물들을 완공했다. 이로써 마침내 창건 당시의 면모가 되살아났다. 연경서원의 재건은 경상도 전 지역의 수령과 향교 및 서원 등의 부조로 이뤄졌다. 이는 연경서원이 경상도의 으뜸가는 서원이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연경서원은 고종 8년인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대구읍지, 구본욱의 저서 임하 정사철과 낙애 정광천 선생’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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