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대구 .7] 동화천변 연경동의 ‘천년 느티나무’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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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26   |  발행일 2017-12-26 제13면   |  수정 2018-01-26
살아서 천년…‘넉넉한 품’으로 주민의 벗·마을의 수호신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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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북구 동화천 인근 연경동 중심부에는 각각 수령 1천년과 300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수호신 격인 이 느티나무들은 주민들로부터 극진한 보호를 받았다. 사진은 느티나무에 단풍이 들기 시작한 지난 11월 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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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북구 연경동은 배산임수의 터로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뒤로는 도덕산 줄기가 내려오고, 앞으로는 동화천이 유유히 흐른다. 조만간 대구를 둘러싸는 4차순환도로가 완공되고 택지조성이 완료되면 연경동 일원은 대구시민의 새로운 주거지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특히 연경동에는 동화천과 함께하며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을의 터줏대감처럼 자리하고 있다.

인천이씨 140여가구가 살던 곳
최근까지도 느티나무서 당산제
봄엔 잎모양으로 풍년·흉년 점쳐

무성한 나뭇잎 정자처럼 비막아
어른과 아이 모두의 사랑방 구실

터전 바뀌어도 나무 못잊는 주민
“견훤과 왕건의 전투 지켜본 증인”


#1 천년의 세월을 견딘 느티나무

연경동 중심부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택지조성 공사 탓에 느티나무 주변은 황량한 공터로 변했지만, 멀리서도 금세 알아볼 만큼 범상치 않은 모습이다. 도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 ‘보호수’라고 적힌 안내판 주변으로 느티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가 보인다. 나무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낼 만큼 위용을 자랑한다. 놀라운 점은 그중 한 그루의 수령이 무려 1천년이나 된다. 높이는 자그마치 17m이고, 가슴높이의 나무 둘레는 무려 6.8m다. 여러 명이 손을 잡고 나란히 서야 간신히 나무를 감싸안을 만큼 굵직하다. 4개의 가지는 하늘을 찌를듯 솟구쳐 있고, 여름이면 풍성한 잎사귀를 피워내 장관을 이룬다. 거대한 고목은 그 존재만으로도 짙은 신비감을 뿜어낸다. 옆의 느티나무 역시 육중한 형세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 나무는 높이가 12m, 가슴높이의 나무둘레는 4.8m로 수령은 300년이다. 안타깝게도 작은 느티나무는 2000년 9월 제14호 태풍 사오마이의 피해를 입어 큰 가지가 부러졌다.

지금 연경동의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 제 자리를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지만, 주민들은 대규모 택지조성이 시작되면서 마을을 떠났다. 느티나무와 함께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주민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연경동 사람들은 여전히 느티나무를 마을의 자랑이자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2 농사 길흉 점치던 마을 수호신

느티나무가 있는 연경동은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140여가구가 모여살던 인천이씨 집성촌이었다. 특히 옛 연경동 주민들은 마을에 자리한 느티나무를 가족처럼 아끼고 돌보며 신성시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민들은 느티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당산제를 올렸다. 매년 정월대보름 당산제 때가 되면 풍물을 하며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했다. 마을의 광장 격인 느티나무 아래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신을 부르는 의식을 치렀다. 특히 주민들은 준비해간 대나무 가지가 흔들리면 신이 내려왔다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대나무 가지를 쥔 사람은 나뭇가지에 깃든 신을 모시고 제관이 될 사람이 사는 집으로 향했다. 상(喪)을 당하거나 정갈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제관이 될 수 없었다. 신을 맞이한 제관은 자신의 집에서 음력 정월대보름부터 2월 초하루까지 신을 모셨다. 매일 아침저녁 식사 공양을 올리는 것은 물론 새벽마다 우물물을 길어 깨끗이 목욕하며 정성을 들였다. 시간이 흘러 2월 초하루 축시(새벽 1~3시)가 되면 느티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낸 후 신을 하늘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연경동 주민들은 2010년대 초까지 당산제를 지내며 느티나무를 마을 수호신으로 모셨지만, 지금은 대규모 택지개발로 주민들이 떠나면서 중단됐다.

당시 연경동 주민들이 극진히 당산제를 올린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최근까지 연경동 일원은 농촌지역이었다. 이곳에 오랫동안 거주했던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연경동의 농민들은 매년 봄이 되면 느티나무의 잎 모양을 보고 풍년과 흉년을 점쳤다. 지하수 수위가 높아 물이 풍부하면 느티나무의 잎사귀가 위·아래 할 것 없이 활짝 피었다고 한다. 반면, 지하수 수위가 내려갈 경우 물을 빨아들이지 못한 느티나무는 한꺼번에 잎을 피우지 못하고 낮은 곳부터 시차를 두고 서서히 잎을 피웠다. 느티나무를 보며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일은 최근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느티나무를 영험하게 여긴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수십년 전 마을 사정으로 당산제를 2~3년 동안 지내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산제를 지내지 않자 마을 젊은이들이 연이어 목숨을 잃는 재앙이 닥쳤다고 전해진다. 9대째 연경동에 살았던 이승하씨(65·대구시 북구 서변동)는 “교회를 다니는 주민들이 늘면서 한때 당산제에 소홀한 적이 있었고, 그 때문인지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후 당산제를 다시 지내자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3 연경동 주민의 놀이터이자 사랑방

연경동 주민들은 마을의 수호신인 느티나무 두 그루를 가족처럼 여겼다. 1천년 수령의 큰 느티나무를 ‘할아버지 나무’로, 300년 수령의 작은 느티나무는 ‘할머니 나무’로 부르며 보살폈다. ‘정자나무’라는 별칭도 있었다. 여름이면 나무가 짙은 그늘을 드리워 마치 정자같이 아늑한 휴식처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나무를 함부로 대할 때면 마을 노인들은 “정자나무를 소중히 여기고 근처에서 나쁜짓 하지마라.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느티나무는 아이에게는 놀이터이면서 주민에게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 아이들은 나무 아래에서 술래잡기와 십자놀이 등을 하며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잎이 무성해 소나기가 쏟아져도 오는 것을 모르고 놀 정도였다고 한다. 어른들은 곧잘 나무 그늘 아래에 모여 화전을 부치며 하루를 보냈다. 중요한 마을 회의장소도 늘 느티나무 아래였다.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느티나무는 아직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나무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할머니 나무’로 불리는 작은 느티나무는 줄기에 큰 구멍이 뚫려있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추위를 피하려는 걸인이 나무 속에 들어가 불을 피웠다가 화를 입었다고 한다.

삶의 터전을 옮겼지만 아직도 연경동 주민들은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느티나무를 잊지 못한다. 더러는 존경의 마음까지 갖고 있다. 1천년 넘게 한 자리에 묵묵히 서서 대구의 역사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이승하씨는 “연경동 일대는 후삼국 시대 견훤과 왕건이 싸운 동수전투(공산전투)의 현장이다. 1천년 넘게 산 느티나무는 당시의 격전을 지켜 본 유일한 증인”이라고 말했다. 이씨를 비롯한 연경동 주민들은 고려 초기 빈번한 전투 속에서 흉흉한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토속신앙의 하나로 이곳에 느티나무를 심은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 기획: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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