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10] 화양구곡(下)...‘금모래 옥돌 깔린 세상 밖 선경’…우암 8세손도 찾아 절경 읊어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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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21 08:21  |  수정 2021-07-06 15:01  |  발행일 2017-12-21 제22면
송달수가 지은 문집 ‘수종재집’
화양구곡 풍광·역사 등 소개글
‘권상하 구곡 순서 정했다’ 기록
20171221
권신응(1728~87)이 1756년에 그린 화양구곡도(충북대박물관 소장) 중 ‘읍궁암’(왼쪽)과 ‘첨성대’. 당시의 화양구곡 내 건물과 바위 등의 위치나 명칭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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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구곡 중 칠곡인 ‘와룡암’ 바위에 새겨진 ‘와룡암(臥龍巖)’ 글씨. 민진원이 약 300년 전에 새긴 전서 글씨로, 굽이마다 같은 글씨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우암 송시열의 후손인 수종재(守宗齋) 송달수(1808~58)의 문집인 ‘수종재집(守宗齋集)’에 실린 ‘화양구곡차무이도가운(華陽九曲次武夷棹歌韻)’(1844년 작)의 내용을 소개한다. 화양구곡의 당시 풍광과 역사, 작자의 생각 등을 잘 알 수 있는 글과 시다. 송달수는 송시열의 8세손으로 1852년 경연관(經筵官)과 사헌부 관리 등을 역임하였으며, 1855년 승지에 이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학문에 힘써 예학과 성리학에 밝았다.

◆1844년에 쓴 송달수의 화양구곡기

화양동 구곡의 시냇물은 동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오다가 괴강(槐江)에 든다. 처음엔 두 물줄기가 멀리서부터 구불구불 흘러오는데, 선유동과 송면(松面) 사이에 합류하고, 파곶(巴串)에 이르면 점점 평평하게 펴져서 흐른다. 계곡은 온통 암반이며 바닥의 돌은 모두 희다. 그 가운데 갈라진 틈 사이로 시냇물이 흐르는데, 그 모양이 ‘곶(串)’ 자와 같다. 파곶이란 이름은 이 때문일 것이다.

파곶에서 왼편으로 조금 내려가면 석봉(石峯)이 갑자기 높이 솟아 있고, 봉우리 위엔 가로로 걸터앉을 만한 커다란 돌이 있다. 위쪽 흙이 조금 덮여있는 곳에 푸르고 무성한 노송이 있다. 이곳이 학소대이다. 옛날 청학(靑鶴)이 새끼를 치기 위해 보금자리를 만든 곳이라고 한다.

학소대 아래로 한 굽이 휘어져 꺾인 곳부터 오른쪽으로 커다란 너럭바위가 수변에 누워있는데 와룡암이다. 와룡암에서 두세 번 굽이 돌아 내려가면 우측에 능운대가 있고, 좌측에 첨성대가 보인다. 능운대 위는 산기슭에 닿아 있고, 아래로는 시냇물에 다다른다. 한 덩어리의 바위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는데, 족히 수십 명은 앉을 수 있겠다. 나무는 바위틈으로 무성하게 자라 그늘을 드리웠는데, 옷깃을 헤치고 서니 매우 상쾌하다.

첨성대는 깎아놓은 것처럼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바위 맨 꼭대기에 겹겹의 돌이 서로 포개져 대를 이루었다. 지붕의 처마를 덮어놓은 것 같다. 그 아래 바위엔 선조 임금의 어필을 새겨 놓았다. 또 돌로 만든 감실은 비바람을 가릴 수 있으니, 참으로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게 숨길 만한 곳이요 귀신이 깎고 새긴 것’이라 이를 만하다.

첨성대 북쪽의 훤히 트인 골짜기에 채운암(彩雲菴)이 있고, 능운대의 아래 그윽이 깊은 곳에 환장사(換章寺)가 있다. 두 곳 모두 승려들이 거처한다. 절 앞쪽에는 운한각(雲漢閣)이 있다. 그 우측 석문에서 바위 위로 나가면 3칸의 암서재가 있다.

암서재 아래는 금사담이다. 골짜기의 물이 바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데, 물살이 세차고 빠른 곳이 많으며, 순탄하게 흐르는 곳은 적다. 여기를 지나면 물살이 잔잔하게 흐르고, 물이 깊고 넓어져서 못을 이루었는데, 금빛 모래가 가득해 맑고 윤기가 나며 깨끗하다. 그래서 금사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일찍이 우암 선생께서 왕래할 당시에는 물고기를 잡는 작은 배가 아니면 건널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심이 얕고 깊은 곳을 따라 옷자락을 걷고 건널 수 있으니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골짜기의 형세가 바뀜을 볼 수가 있다.

금사담을 지나 수십 보 아래의 읍궁암은 우암께서 효종 임금의 제삿날이면 통곡한 곳이다. 읍궁암 곁 평지의 정사는 우암 선생께서 거처한 곳이다. 정사의 남쪽 조금 위에 만동묘를 세우고, 만동묘 아래에는 서원을 세웠다. 그리고 서원 앞에 소양(昭陽)·열천(洌泉)의 두 재(齋)가 있다.

정사 북쪽 조금 아래에는 운영담이 있는데, 금사담 하류에서 읍궁암까지 바위와 돌을 만나 물살이 빠르다. 운영담에 이르면 고르고 넓은 물이 못을 이루고, 곁의 석벽은 짙푸른 등나무 넝쿨이 서로 뒤섞여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운영담 아래에서 다시 몇 굽이를 지나면 푸른 석벽이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으니, 바로 경천벽이다. ‘힘차고 고귀해 굽히지 않는 기상과 두껍고 무거워 옮길 수 없는 형상’이라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화양구곡은 경천벽에서 시작해 파곶까지이다. 구곡의 명칭은 어느 때 비롯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것은 형상을 보고 짓거나 역사적 사실에 따라 명명하기도 했다. 아니면 경치 때문에 이름을 붙이기도 했을 것이다.

구곡의 순서는 한수재(寒水齋) 권상하 선생께서 정했으며, 굽이마다 새긴 전자(篆字)는 담암 민진원의 글씨다.

(중략) 옛날에 율곡 선생이 석담에 살면서 고산구곡가를 읊은 것은 무이고사(武夷故事)를 모방한 것이다. 우암선생께서도 무이도가의 첫 편을 차운해 시를 짓고, 나머지 아홉 편의 절구는 당시의 여러 현인에게 부탁해 그들로 하여금 운을 따서 고산구곡시를 짓게 했다. 그러나 오직 화양구곡만은 무이도가를 차운해 지은 시가 없으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 뒤의 현인들도 우암 선생이 고산구곡의 시를 지은 것처럼 차운해 지은 시가 없으니, 역시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이에 감히 재주 없음을 잊고, 삼가 무이도가의 운을 써서 화양구곡시를 지으니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동지들은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다. 주자의 무이도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흥을 일으키고, 정취를 미루어 도의 오묘한 진리를 밝혀내 뜻이 원대하고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다. 솜씨가 서툰 내가 어찌 만분의 일이나마 주자를 본받을 수 있겠는가마는 다만 그 경치를 보고 묘사하고자 하였을 뿐, 고산구곡시의 여러 작품과 같은 빼어남은 마침내 미칠 수가 없다. 여러 동지들은 시로서 이를 보지 말고 뒤이어 답시를 지어 선비들의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기를 바란다. 1844년 여름.

◆주자 ‘무이도가’를 따라 지은 송달수의 화양구곡시

하늘이 대현(大賢)을 내려 땅의 정기 열리고/ 화양의 맑은 물은 무이(武夷)에 닿아있네/ 겨울 소나무 홀로 봄빛을 띠니/ 세월 흘러도 아름다운 풍속 다하지 않으리라 <서시>// 일곡이라 봄 물결 일어 배 띄울 만한데/ 하늘 높이 솟은 푸른 암벽 물 깊은 시내 곁에 있네/ 애오라지 한 손으로 돌기둥 떠받들고/ 우뚝 서서 언제 세속 일에 물든 적 있었으랴 <경천벽>// 이곡이라 맑은 못에 푸른 봉우리 기울고/ 흰 구름 한 장이 산을 덮었네/ 때때로 지나가며 인간세상에 비 내리고/ 또 숲을 겹겹이 감싸는구나 <운영담>// 삼곡 바위 위에 낚싯배 매어두니/ 봄날 서재의 하루 일년 같네/ 찬 시냇물 임금의 승하 슬퍼하는 눈물인 양/ 밤낮 울부짖으며 흐르니 너무 애처롭구나 <읍궁암>// 사곡이라 도인을 찾아 가파른 바위에 올라가니/ 듬성듬성 가늘고 푸른 소나무 집 주위에 늘어져 있네/ 금모래 옥돌 깔린 세상 밖 선경이 펼쳐지니/ 천년의 마음 담은 달빛이 못에 비추는구나 <금사담>// 오곡이라 산을 따라 점점 깊이 들어가니/ 숲은 하늘 높이 첨성대 위로 솟아났네/ 하느님이 솜씨 좋게 절벽의 돌 다듬어/ 충정(衷情)의 신하에게 나라 위해 마음 쓰게 한 것이라네 <첨성대>//

육곡이라 우뚝 솟은 층대는 푸른 물굽이에 의지하고/ 높이 솟아올라 성큼성큼 걸어 겹겹의 문 통과하네/ 그윽한 곳 산새와 이야기하고 아름다운 꽃나무와 어울려/ 지팡이 눕히고 신 벗어 놓고 종일 한가로이 보내노라 <능운대>// 칠곡이라 푸른 절벽 흰 돌에 여울이 일고/ 와룡의 신기한 흔적 길이 머무르네/ 숨어 있어도 스스로 밝은 덕 드러나/ 끝내 짙은 그늘 추위 속에서 온누리로 나오리라 <와룡암>// 팔곡이라 구름 안개 내렸다가 다시 걷히니/ 푸른 솔 우뚝 솟고 물은 굽이굽이 휘돌아가네/ 늘그막에 수많은 바위에 정붙여 벗처럼 의탁하니/ 산 사립문에 나그네 온다고 알리지 마라 <학소대>// 구곡이라 파곶 계곡 가장 시원스레 탁 트였으니/ 찬 돌이 눈처럼 깔려 있고 옥은 냇물에서 솟아오르네/ 가고 가다가 비로소 참다운 근원에 이르렀음을 깨달았으니/ 빼어난 경치는 모두 이곳 동천(洞天)에서 다하였네 <파곶>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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