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9] 화양구곡(上)...송시열의 은거처…20년 거주하며 제자들과 중화문명의 성지를 꿈꾸다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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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07 08:13  |  수정 2021-07-06 15:00  |  발행일 2017-12-07 제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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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이 은거했던 화양동계곡의 화양구곡 중 2곡 운영담(雲影潭). 맑은 물에 구름이 비치는 못이라는 의미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속리산국립공원 내 화양천 3㎞ 구간에 자리하고 있다.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좌우 자연경관이 빼어난 지점에 구곡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구곡이 있지만, 화양구곡은 보기 드물게 1곡부터 9곡까지 원형을 거의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화양구곡은 2014년 8월에 대한민국의 명승 제110호로 지정됐다. 화양구곡이 있는 화양계곡은 청화산(988m)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흐르는 화양천과 그 주변에 있는 가령산·도명산·낙영산·조봉산 등이 둘러싸듯 어우러져 만들어진 계곡이다. 이 일대의 지질은 화강암이 잘 발달돼 있다. 화양천이 흐르면서 골짜기에 있는 화강암을 침식시키면서 기암괴석이 하늘을 향해 떠받들고 있는 듯한 모습을 비롯해 절벽·바위·소 등 다양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빚어내고 있다.

◆송시열 유적 중심으로 설정한 화양구곡

화양구곡은 우암(尤庵) 송시열(1607∼1689)이 은거처를 마련, 도학을 닦으며 남긴 유적들을 중심으로 설정된 구곡이다. 송시열은 60세 되던 1666년 8월부터 화양동에 계당(溪堂)을 짓고 머물기 시작했다. 그는 회덕으로 돌아간 1686년 4월까지 화양동에서 20년간 살았다. 우암과 그의 제자들은 이곳 구곡의 바위에 여러 가지 글씨를 새기는 등 많은 유적을 남겼다.

이곳 화양동은 원래 황양목(회양목)이 많아 황양동(黃楊洞)이라고 불렸으나, 송시열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이름을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화(華)는 중화(中華)를 뜻하고, 양(陽)은 일양내복(一陽來復)에서 따왔다. 일양내복은 불행이 지나가고 행운이 찾아오는 것을 뜻하는데, 군자의 도가 사라졌다가 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 명승 제110호로 지정
우암 송시열의 제자 수암 권상하
스승의 유적 중심으로 처음 설정
단암 민진원이 범위와 명칭 확정
1곡부터 9곡까지 원형 완벽 유지
괴석이 하늘 떠받친 모습 제1곡
경천벽 華陽洞門은 송시열 글씨



우암과 그의 제자들은 중국의 명나라가 망해버린 마당에 중화문명을 지켜낼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조선밖에 없다면서 화양구곡을 경영하며 구곡의 큰 바위에 명나라 황제와 조선 국왕의 글씨를 새기는 등을 통해 화양구곡을 중화문명의 성지(聖地)로 만들고자 했다.

명나라는 쇠퇴하고 청나라가 일어서면서, 청은 명나라를 치기 전 조선을 두 번 침략했다. 조선은 두 번의 전쟁에서 패전했으면서도 청을 오랑캐로 보고, 비록 망했지만 유교의 도통(道統)을 이은 명나라를 문명국으로 보고 따랐다. 이런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의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다.

화양구곡은 송시열이 사망한 후 제자인 수암(遂菴) 권상하(1641∼1721)가 처음으로 설정하고, 이후 단암(丹巖) 민진원(1664~1736)이 구곡의 범위와 명칭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그 이름을 전서로 바위에 새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민진원이 화양구곡 9개 굽이의 범위와 명칭을 최종 확정한 시기는 1721년에서 1727년 사이일 것으로 전문가는 추정하고 있다.

지금의 화양구곡 명칭은 제1곡 경천벽(擎天壁), 제2곡 운영담(雲影潭), 제3곡 읍궁암(泣弓巖), 제4곡 금사담(金沙潭), 제5곡 첨성대(瞻星臺), 제6곡 능운대(凌雲臺), 제7곡 와룡암(臥龍巖), 제8곡 학소대(鶴巢臺), 제9곡 파곶(巴串)이다.

◆구곡 굽이마다 전서로 이름 새겨

‘화양지(華陽誌)’에는 구곡에 대해 곡마다 이름을 붙인 연유와 풍광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화양지는 1744년(영조 20)에 송주상(宋周相)이 편찬하고 1861년(철종 12)에 송달수·송근수 등이 증보해 간행한 화양동(華陽洞)·만동묘(萬東廟)·화양서원(華陽書院) 등에 대한 기록이다.

제1곡 경천벽은 기암괴석이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바위에는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제2곡 운영담은 경천벽에서 400m 정도 위에 있는 계곡으로 맑은 물이 모여 소를 이루고 있다.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 하여 운영담이라고 한다. 주자의 시 구절 ‘하늘 빛(天光) 구름 그림자(雲影)’에서 취한 것이라고 화양지에 적고 있다.

제3곡 읍궁암은 운영담에서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계곡 가에 있는 바위다. 희고 둥글넓적한 이 바위는 송시열이 제자였던 임금 효종이 죽자 매일 새벽 이 바위에 올라 엎드려 통곡했기에 읍궁암이라 불렀다. 읍궁은 활을 보고 울었다는 말. 활은 귀인의 죽음을 비유하는데, 여기서는 효종의 승하를 말한다. 효종 제삿날 5월4일이 되면 이 바위 위에서 대궐을 향해 통곡했다. 읍궁 옆에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 권상하 등이 중국의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만동묘(萬東廟)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있다.

제4곡 금사담은 맑은 물 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같이 깨끗해 지은 이름이다. 금사담은 화양구곡의 중심이다. 금사담 옆 바위 위에는 암서재(巖棲齋)가 있다. 송시열이 기거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현재의 암서재는 198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1669년 송시열이 지은 암서재 시다. ‘시냇가 절벽 사이(溪邊石崖闢)/ 그 틈에 집 지었네(作室於其間)/ 차분히 성현의 말씀 찾아(靜坐尋經訓)/ 분촌도 아끼며 공부한다네(分寸欲 攀).’ 이 시 현판이 암서재에 걸려 있다.

암서재 옆 직립한 바위에 ‘창오운단 무이산공(蒼梧雲斷 武夷山空)’이란 송시열 글씨를 쓴 암각문이 있다. 창오운단에서 창오(蒼梧)는 순임금이 죽은 곳이다. 창오에 구름이 끊어졌으니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王)·무(武王)→주공(周公)으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이 끊겼음을 이야기하고, 그 끊긴 도통을 무이산에서 공부한 주자가 이었으나, 이제 무이산도 비었다며 도통이 끊어졌음을 한탄한 말이다. 또 하나의 암벽에 새긴 큰 암각 글씨로 명나라 태조의 글씨인 ‘충효절의(忠孝節義)’가 있다.

제5곡 첨성대는 금사담에서 1㎞쯤 올라가면 나온다. 큰 바위가 첩첩이 겹쳐 높이 솟아 있고 그 위에서 별을 관측할 수 있다 하여 첨성대라 한다. 첨성대에는 의미 깊은 암각문이 있다. 첨성대 아래 큰 바위에 새겨진 선조의 글씨 ‘만절필동(萬折必東)’과 숙종의 글씨인 ‘화양서원(華陽書院)’이다. 만절필동은 황하(黃河)가 만 번 굽이쳐도 결국은 동으로 간다는 뜻으로, 동(東)은 원래 중국의 동쪽을 가리키나 우리나라로도 볼 수 있다.

제6곡 능운대는 시냇가에 우뚝 솟아 있는 큰 바위인데,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붙인 이름이다.

제7곡 와룡암은 계곡 가의 크고 넓은 바위(길이 30m·폭 8m)인데, 그 모습이 꿈틀거리는 용을 닮았다.

제8곡 학소대는 바위가 쌓여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이 바위산에 큰 소나무들이 자라는데, 이곳에 학들이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이름을 학소대라 했다.

학소대에서 1㎞ 정도 거슬러 오르면 제9곡 파곶이다. 개울 복판에 희고 넓은 바위가 펼쳐져 있는데, 그 위로 흐르는 물이 마치 용의 비늘을 꿰어놓은 것처럼 보여 파곶이라 한다. 넓고 평평한 바위에 용의 비늘무늬를 연상시키는 포트홀(돌개구멍)이 발달돼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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