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8] 고산구곡(下)...詩書畵評(시서화평) 망라 고산구곡도 ‘학문 정통성-정치적 결속’ 상징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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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23 08:03  |  수정 2021-07-06 14:59  |  발행일 2017-11-23 제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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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고산구곡을 그린 고산구곡도병(영남대박물관 소장). 고산구곡도는 17세기 말 송시열이 주도해 본격적인 제작이 이루어졌고, 이후 율곡학파의 연원과 계보를 상징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18세기 중엽 정선 작으로 기록된 ‘석담도’와 1781년 정조 임금의 명으로 그린 ‘석담구곡도’ 계통의 그림 등이 전해진다. 이 그림은 첫째 폭의 발문에 따르면 후자의 전통을 이어 1817년에 모사한 것이다.

율곡 이이는 고산구곡을 경영하면서 고산구곡가를 지었는데, 퇴계 이황의 구곡시와는 달리 시조의 형식을 빌려서 한글로 지었다. 이 고산구곡가는 주자가 지은 무이도가의 조선화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리고 무이도가와 달리 굽이마다 지명을 언급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시대 구곡시가의 보편적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이의 고산구곡가는 주자의 무이도가를 본받은 것이지만 무이도가와는 그 시의(詩意)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다. 무이도가는 무이산에서 각 굽이의 경치를 평화로이 즐기는 주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것인 반면, 고산구곡가는 각 굽이의 경치를 하루와 1년의 시간 흐름 속에 나타내고 있다. 동시에 고산에서 강학과 음풍농월을 하며 무이산의 주자를 흠모하는 자신의 마음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인생과 자연에 대한 관조를 통해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그것과 일치시키는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무이도가가 역대 시인들이 본받아 쓴 시들이 첨가돼 거대한 작품군을 형성한 것처럼, 고산구곡가도 관련 한시 작품들이 보태어지면서 하나의 작품군으로 형성된다.

◆송시열 주도로 제작한 고산구곡도

이이의 고산구곡 경영과 고산구곡가 창작은 후대에 이르러 고산구곡도 제작으로 발전한다. 고산구곡도는 이이가 별세한 뒤 문인들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되는 기록이 옥소(玉所) 권섭(1671~1759)의 ‘옥소장계(玉所藏)’에 수록된 ‘고산구곡도설(高山九曲圖說)’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이이의 서현손(庶玄孫)인 이석이 그린 ‘고산구곡도’를 원만령(元萬齡)이 소장하고 있다가 김수증에게 주었다. 그리고 김수증으로부터 그 작품을 증여받은 송시열은 김수증, 김수항, 권상하 등 9명에게 고산구곡가의 차운시를 짓게 해 그림과 함께 장정했다고 한다. 한시와 시조에 능했던 권섭은 권상하의 조카이며, 옥소장계는 기호학파의 구곡가 관련 시문들을 모은 것이다.


구곡가 창작과 함께 구곡도까지 제작
李珥 학통 이어받은 우암 송시열 주도
김홍도·김득신 등 당대 유명화가 참여

조선말 양반문화 동경 農工商 부유층
소박한 형식 선호 ‘民畵’로도 그려져



이처럼 고산구곡도 제작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시작되는데, 특히 이이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로 노론의 핵심 인물인 우암(尤庵) 송시열(1607~1689)이 주도적이었다. 이이의 학통을 이은 서인 노론계 문사들은 고산구곡을 이이의 학문적 상징 공간으로 삼고, 그 위상을 높이기 위해 고산구곡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후 고산구곡도의 초기 양식은 18세기 이후로 계승되면서 범본(範本)의 기능을 하였고, 19세기에는 민간 화가들이 그린 민화의 소재로도 널리 그려졌다.

송시열은 당시 황폐화된 고산구곡을 정비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차운(次韻)한 한시를 짓게 한 뒤, 이를 그림과 함께 목판화로 제작해 보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송시열이 고산구곡도를 제작한 배경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노론계 문사들은 이이로부터 이어지는 학통을 자신들의 정통성으로 삼고, 정치적 결속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물로서 고산구곡도를 활용했던 것이다.

현재 전하는 대표적인 고산구곡도 작품으로는 국보 제237호로 지정된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이 있다. 1803년 노론계의 사대부, 문인, 화가 등 총 21명이 발(跋)·제(題)·시(詩)·서(書)·화(畵)·평(評) 등을 맡아 제작한 것이다. 현부행(玄溥行)의 발의로, 이이가 은거했던 황해도 해주의 고산구곡의 경치와 시를 모아 화원과 문인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문신들이 시를 쓴 것 등을 한데 모아 병풍으로 꾸민 것이다.

각 폭의 최상단에는 조선 후기 명필 유한지(1760~1840)가 쓴 표제가 있고, 그 아래 상반부에는 이이의 ‘고산구곡가’와 송시열의 고산구곡가 한역시 및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계 기호학파 제자들의 역화시(譯和詩)가 김조순 등 안동김씨 일문의 문신들 글씨로 적혀 있다. 이어 화면의 중·하단에 고산구곡의 각 경치가 그려져 있으며, 여백에는 각 폭마다 김가순(金可淳)이 쓴 제시(題詩)가 있다.

12폭 중 제1폭에는 율곡 이이의 제자로 당대의 대표적 문장가인 최립(1539~1612)의 ‘고산석담기(高山石潭記)’가 실려 있다. 제2폭은 ‘구곡담총도’를 김이혁(金履赫)이 그렸으며, 이후 3폭부터 11폭에는 각각 고산구곡의 경치가 하나씩 그려져 있다.

1곡인 ‘관암도’는 김홍도(金弘道)가, 2곡 ‘화암도’는 김득신(金得臣)이, 3곡인 ‘취병도’는 이인문(李寅文)이, 4곡인 ‘송장도’는 윤제홍(尹濟弘)이, 5곡 ‘은병도’는 오순(吳珣)이, 6곡 ‘조협도’는 이재로(李在魯)가, 7곡 ‘풍암도’는 문경집(文慶集)이, 8곡 ‘금탄도’는 김이승(金履承)이, 9곡 ‘문산도’는 이의성(李義聲)이 그렸다. 마지막 12폭에는 송시열의 6세손 송환기(宋煥箕)의 발문과 석담구곡시가 있다.

이 고산구곡도는 진경산수화와 남종화의 화풍을 따랐고, 각 경관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감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시 이름난 화가들의 특색과 기량이 잘 나타나 있어 그들의 역량을 비교해 볼 수도 있다.

◆민화로도 그려진 고산구곡도

이와 함께 19세기에 그려진 고산구곡도의 대표작은 홍익대 박물관과 영남대 박물관 소장의 10폭 고산구곡도병이다. 두 병풍은 1817년 작으로 글씨 한 폭과 그림 아홉 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속의 경물은 화면 아래에서 위쪽으로 쌓아 올라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고산구곡도병의 화풍은 19세기에 확산된 남종문인화풍에 바탕을 두면서도 약간의 형식화가 진행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이를 민화풍으로 계승한 사례로는 건국대 박물관 소장 고산구곡도병을 들 수 있다. 이 10폭 병풍 역시 글씨 1면과 그림 9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고산구곡도병은 그림의 구도가 앞 시기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으나 표현상의 미숙함이 드러난다. 특히 묘사에 형식화가 두드러진 점과 초보적인 묘사는 민화풍의 일반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에 가깝다.

구곡도를 소재로 한 민화는 일반 민화와 달리 양반 문화에 대한 동경의식이 깔려 있는 그림이다. 민화 구곡도류의 수요층은 18세기 후반부터 부를 축적한 상인과 부농, 그리고 기술직 중인을 비롯한 신흥부유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세기로 이어진 신흥부유층의 사회적 진출과 지위 상승은 양반문화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현상을 불러왔다. 이처럼 민화 구곡도가 그려진 중심에는 바로 신흥부유층과 그들의 수요가 있었다. 이들은 그림의 화격을 크게 따지지 않았고, 소박한 형식의 그림을 선호했다.

조선시대의 구곡도는 회화사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성취를 이루었다. 첫째,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무이구곡도’를 조선구곡의 조성과 함께 한국적인 화풍의 구곡도로 전환하였다는 점이다. 17세기 이후 무이구곡도의 장소성과 화풍을 조선화된 구곡도로 창출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둘째, 지식인들의 전유물과 같았던 구곡도를 대중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민화의 주제와 양식으로 변환을 이룬 점이다. 구곡도는 한국화와 대중화라는 두 측면에서 뚜렷한 성취를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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