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6] 안동 도산구곡(下)...퇴계 후학이 설정한 도산구곡…5곡까지는 대부분 안동댐에 잠겨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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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26 08:06  |  수정 2021-07-06 14:58  |  발행일 2017-10-26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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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구곡 중 8곡에 있는 고산정 주변 풍경. 도산구곡은 퇴계 이황이 만년을 보냈던 안동 도산을 중심으로 낙동강 상류 오천마을 부근에서 청량산 입구까지 27㎞에 걸쳐 설정됐다.

도산구곡이 언제 누구에 의해 설정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황이나 그의 제자들 문집에서 이황이 도산구곡을 설정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기록이 없어 이황이 직접 설정하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도산구곡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후계(後溪) 이이순(1754~1832)의 문집 ‘후계집(後溪集)’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내가 보건대 청량에서 운암까지 45리 사이에 명승지가 많은데 도산이 그 가운데 자리해 상하를 관할하며 한 동천을 만든다. 시험 삼아 그 굽이를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곳을 무이구곡의 예를 따라 나누면 운암(雲巖)이 제1곡이 되고, 비암(鼻巖)이 제2곡이 되고, 월천(月川)이 제3곡이 되고, 분천(汾川)이 제4곡이 되고, 탁영담이 제5곡에 있으니 이곳은 도산서당이 있는 곳이다. 제6곡은 천사(川砂)이고, 제7곡은 단사(丹砂)이고, 제8곡은 고산(孤山)이고, 제9곡은 청량(淸凉)이니 굽이굽이 모두 선생의 제품(題品)과 음상(吟賞)이 미친 곳이다.’

선생 死後 이이순이 처음 언급
무이도가 차운 구곡詩도 지어
후손들 지금까지 20여편 남겨
구곡 지점·명칭 일치하진 않아

19세기 후반 편찬된 ‘오가산지’
사림 견해 등 종합해 구곡 확정

이이순은 이렇게 구곡을 자신이 직접 정하고,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한 시 ‘유도산구곡경차무이도가운십수(遊陶山九曲敬次武夷棹歌韻十首)’도 지었다. 이 기록 등을 통해 볼 때 도산구곡 설정은 18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도산구곡시도 18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창작되었다. 특히 이황의 후손들에 의해 많이 지어졌다. 그 대표적 인물이 후계 이이순, 광뢰(廣瀨) 이야순(1755~1831), 하계(霞溪) 이가순(1768~1844)이다. 이밖에 이종휴(1761~1832), 조술도(1729~1803), 금시술(1783~1851), 최동익(1868~1912) 등도 도산구곡시를 지었다. 현재까지 도산구곡시는 20여편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도산구곡시를 보면 구곡의 지점이나 명칭이 대동소이하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점도 도산구곡이 이황이 아니라 후학들이 설정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의 ‘오가산지(吾家山誌)’에는 구곡의 위치와 명칭을 정리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오가산지는 이황이 ‘오가산’이라 명명한 청량산과 관련된 이황의 시문 등을 모은 책으로, 이만여(1861~1904)가 편찬했다. ‘청량산지’라고도 불린다.

‘명종 병인년(1566) 임금이 도산을 그리기를 명하고, 그 후 영조 계축년(1733)과 정조 임자년(1792)에 또 그림을 그려서 올려라 명하니, 도산을 그린 것이 청량에서 운암까지 구곡이 된다. 삼가 이 화본에 의거해 청량의 여러 시를 먼저 싣고 도산의 여러 시를 총체적으로 묶어서 청량에서 도산까지, 도산에서 운암까지 길을 따라 지은 시를 하나하나 갖추어 기록해 한 구역의 산천을 총괄한다. 구곡은 1곡이 운암(雲巖), 2곡이 월천(月川), 3곡이 오담(鰲潭), 4곡이 분천(汾川), 5곡이 탁영(濯纓), 6곡이 천사(川砂), 7곡이 단사(丹砂), 8곡이 고산(孤山), 9곡이 청량(淸凉)이다.’

이를 통해 오가산지를 엮을 때 기존의 여러 도산구곡시를 참고하고 안동 사림의 견해를 종합해 도산구곡을 확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도산구곡의 지점은 이이순, 이야순 등이 설정한 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특히 이가순이 설정한 구곡의 지점과 동일하다.

현재 도산구곡 중 5곡까지는 안동댐 건설로 대부분 수몰되어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이야순 도산구곡가

대표적 도산구곡가인 이야순의 도산구곡가 ‘차무이구곡도가운십수(次武夷九曲棹歌韻十首)’를 따라 그가 정한 도산구곡 풍경과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비단 같은 산과 유리 같은 맑은 물 신령스러운데/ 산은 더욱 높고 강물은 더욱 맑구나/ 무이산 거대한 은병봉이 여기서 멀다 말하지 말게/ 천년 동안 한 곡조의 뱃노래로 다 함께 들린다네.’ 이야순은 이 서시에서 도산구곡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무이구곡의 은병봉을 거론하면서 주자의 무이구곡과 비교하고 있다.

‘일곡이라 바위 위의 구름 배를 잡아당길 듯하고/ 추로지향 군자 많지만 그 중에도 오천이라네/ 단풍에 어린 저녁 풍경 누가 이어 노래하리/ 쓸쓸한 절에는 한 점 푸른 연기만 머물 뿐.’ 안동 오천 군자리 부근에 있던 1곡 운암사(雲巖寺)는 이야순 당시에도 이미 퇴락했던 모양이다. 안동이 조선의 대표적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향)으로 불려 왔는데 그 중에서도 오천마을이 으뜸으로 꼽혔다.

‘이곡이라 부용봉 옥을 깎아 만든 듯/ 누굴 위해 만들었나 달빛 가득한 풍월담/ 학문으로 나아가는 길의 연원은 트여 있으니/ 구름 연기 한두 겹 막혔다고 말하지 말게나.’ 2곡은 월천(月川)이다. 1곡에서 6㎞ 정도 거슬러 오르면 월천이다. 이황의 제자인 월천 조목이 이 월천마을에 살면서 동네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댐이 생기면서 주민 대부분 떠나갔고 언덕 위에 월천서당이 있다. 월천 조목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삼곡이라 연못의 자라 배를 이고 있는 형상/ 우리나라 역학이 어느 해에 시작되었나/ 오랜 세월 공력 쌓아 주역 이치 밝혔는데/ 명교당 정일재 안에는 달빛만 다시 애잔하네.’ 3곡 오담(鰲潭)은 우탁(1262~1342)을 모신 역동서원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이곳 역시 안동호 물에 잠겨버렸다. 우탁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역동서원은 1969년 안동시 송천동으로 옮겼다.

‘사곡이라 거센 물가 바위 귀머거리 되고/ 바위 위 구름 겹겹이 둘러싸 푸르게 내려오네/ 농암에 살던 신선 지금은 어디에 계신가/ 복사꽃잎 떨어지고 있는데 달은 못속에 숨어있네.’ 4곡은 분천(汾川)이다. 이곳 역시 수몰되었다. 농암 바위가 유명한 분천마을은 영천이씨 집성촌으로, 농암 이현보가 대표적 인물이다. 시에서 농암에 살던 신선은 이현보를 말한다.

‘오곡이라 탁영담은 깊고 깊어서/ 채우고 남은 물결 사방을 적시네/ 옛날 같은 달과 끝없이 흘러오는 물/ 고인을 생각하니 실로 내 마음과 합하는구나.’ 5곡 탁영담(濯纓潭)은 도산서원 앞 물결이 굽이도는 지점이다. 이황은 탁영담에서의 뱃놀이 운치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5곡에 있는 도산서원은 무이구곡 중 주자가 머물렀던 5곡의 무이정사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공간이다.

‘육곡이라 나무숲이 옥 같은 물굽이를 감싼 곳/ 피라미와 백로는 사이좋게 지내네/ 하명동(霞明洞)에 핀 늦은 꽃 더욱 어여뻐/ 서쪽 바라보며 한적한 골짜기 하나 차지했네.’ 6곡 천사(川砂)의 풍경을 읊고 있다. 한적한 골짜기는 중국 북송의 문필가인 왕안석의 시 구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은거하며 살고픈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칠곡이라 휘감아 도는 한줄기 여울물/ 갈선대와 고세대를 다시 돌아 보네/ 만 섬의 붉은 단사 하늘이 감춘 보배/ 푸른 절벽에 구름 일어 찬물이 어리네.’ 7곡 단사(丹砂)는 강변의 벼랑이 붉은 빛을 띠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갈선대와 고세대는 강변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도가의 인물에서 따와 붙인 것이다.

‘팔곡이라 옥거울 같은 물가에 홀로 선 산/ 또렷또렷한 심법(心法)이 이 물가에 맴도는구나/ 멈추어 노래하다 푸른 절벽 향해 묻노니/ 지팡이 짚고 시 지어 노닐던 분 기억하는가.’ 8곡 고산(孤山)이다. 강변에 우뚝 솟은 암봉이 고산이고, 맞은편 강변에 고산정이 자리하고 있다. 고산정은 이황의 제자인 성재 금난수가 머물던 정자다.

‘구곡이라 산이 깊어 형세가 끊어진 곳/ 누가 알리 산속에 이런 냇물 있을 줄/ 복사꽃 뜬 물결에 세인들 알까 두려우니/ 백사장 백로에게 이 동천(洞天) 보호하라 분부하리라.’ 9곡 청량(淸凉)은 청량산 입구의 강마을인 광석마을 주변이다. 청량산을 사랑한 이황은 스스로 호를 ‘청량산인’이라 짓고 이 산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야순은 복사꽃이 떠내려가면 혹여나 세상사람들 눈에 띌지 모르니 백로에게 이 곳을 보호하라 부탁하고 있다. 이황이 지극히 사랑했던 산이기 때문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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