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그곳 .7] 봉화 춘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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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동욱기자
  • 201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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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을 억지로 돌렸다고 해서 ‘억지 춘양’이라는데…

수많은 목도와 장꾼이 북적이던 춘양역은 그때의 호시절은 지났지만, 지난해부터 중부내륙관광열차가 운행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연장 71.43m의 춘양곡 철교는 가설을 완료한 1955년이나 지금이나 교각이 철로 된 흔치 않은 구조물이다.

춘양역을 지나는 철길은 특이하게 ‘Ω’자 형태로 춘양 시내를 한바퀴 둘러간다. 철길 건설 초기에는 임기 쪽으로 곧바로 놓을 계획이었지만 이 지역 출신 권력실세가 춘양 주민을 위해 철길을 돌렸다고 한다.
춘양 터널을 빠져 나온 기차는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초록의 철교 위를 달렸다. 철길은 이내 부드럽게 굽고, 다시 연속으로 굽으며 조금씩 천천히 마을을 한눈에 감싸 안았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뜨거운 소리에도 마을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햇빛 쟁글쟁글한 마당에 모여 앉은 병아리처럼 평화로웠다. 기차는 마을을 거의 한바퀴 온전히 휘감고 나서야 더욱 천천히, 기적을 길게 울리며 역으로 들어섰다.

#1 청백리 실세의 고향사랑이 돌린 철길
다사다난했던 춘양역 건설

춘양역은 봉화군 춘양면의 동쪽, 의양리의 자연부락 ‘운곡’에 서있다. 역 앞으로는 춘양 사람의 목을 적시는 운곡천이 흐르고 뒤로는 높은 산이 둘러져 있다. 산마루에는 항상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는데 그 속에 ‘운중선인’이라 불린 신선이 살았다고 전한다. 마을의 이름 운곡은 바로 그 구름의 계곡에서 왔다. 춘양역은 그 계곡 아래 봄빛마냥 양지 바른 곳에 서있다.

춘양역은 1955년 7월1일 개통됐다(1955년 6월28일 대한민국관보 교통부고시제416호).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 물자 확보에 다급해진 일본은 춘양의 풍부한 임산물과 광산물 수송을 위해 영주∼춘양 간 영춘 철로 부설에 착수했다. 그러나 광복을 맞으면서 공사는 중단되었고 그해 폭우로 선로는 유실됐다.

광복 이후 정부는 우리 손으로 영춘선을 확대한 영암선 건설을 재개했다. 하지만 6·25전쟁과 함께 다시 중단되었고 53년부터 다시 계속됐다. 총 연장 71.43m의 춘양곡 철교는 그때나 지금이나 교각이 철로 된 흔치 않은 구조물이다. 영암선 건설에서 특수 구조물로 선택된 이 교량은 전쟁 전 이미 설계를 마쳤지만 종전후 새로 도입된 디젤 기관차의 하중을 감안해 재설계됐다. (당시 설계자는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선정된 유신코퍼레이션 전긍렬 회장이다)

춘양 철교는 55년에 제작 및 현지 가설을 완료해 오늘날까지 끄떡없이 잘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해 춘양역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축 개통’ 플래카드가 내걸렸고,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우렁찬 기적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암의 무연탄을 실은 첫 열차가 우리의 손으로 부설된 철길을 타고 서울로 운송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첨에는 증기기관차가 댕겼어. 석탄을 많이 옮겼지. 그때는 저 앞에 고개를 몬 올라가가, 다시 내려와서 탄력을 받아서 올라가고, 앞뒤로 밀어서 올라가고 그랬어. 디젤 기관차 왔을 때도 그랬어. 언덕이 각도가 심하거든.”

“그런데 이것 좀 봐봐. 기찻길이 희한하지? ‘Ω’자로 춘양 시내를 둘러 가잖아. 원래는 이래 둘러 안 가고 임기 쪽으로 곧바로 가는 계획이었거든. 근데 철로를 닦다가 일로 옮겼다 그래. 그때가 자유당 시절이었어. 자유당 무너지기 전까지도 원내 총무를 했던 정문흠씨가 여기 출신이야. 그분 굉장히 청렴한 사람이야. 진짜 재산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4·19가 끝나고 사람들이 집을 부수러 왔는데 다 쓰러져 가는 기와집에 그 아들이 똥지게를 지고 똥을 푸고 있더라는 거야. 그래서 그냥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어. 지금도 그 집에 후손이 살고 있는데 초상화만 걸려 있는 촌집이야. 그 시절에 하늘에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청렴했어. 그런 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면민이 편하게 살 수 있게 된 거지. 그때 봉화군의 절반이 이쪽에 살았거든. 그래서 그분이 철길을 이래 돌렸다 그래. 이래 보면 이 철길이 명물이잖아. 동네를 한바꾸 돌아가는 건 여기밖에 없어. 철길을 바꾸는 게 얼마나 큰일이었겠어. 그렇게 억지로 철길을 돌렸다고 해서 ‘억지춘양’이란 말도 생겼지.”

#2 억지로 철길 돌려서 억지춘양?
춘양목의 고장이어서 억지춘양!

철길은 ‘Ω’자로, 혹은 ‘오메가’ 모양 또는 말발굽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다. 아무리 봐도 정말 ‘억지춘양’이 맞다. 억지춘양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것 외에도 여러 설이 분분하다. 그중 하나가 ‘춘양목’에 얽힌 이야기다.

1932년의 한 신문 칼럼을 보면 ‘산업과 교통’이란 제목 아래 ‘춘양의 특산은 목재와 황금이다. 춘양의 목재인지 목재의 춘양인지 또는 춘양의 황금인지 황금의 춘양인지 알 수 없을 만치 그 생산이 풍부하다’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목재란 금강송을 뜻한다. 춘양은 옛날부터 금강 소나무의 유명한 산지였다. 황장목, 적송 등으로 불린 금강송은 우리나라 태백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북도 일대에서 자라는 수형이 곧고 재질이 좋은 붉은 소나무다. 옛날에는 왕이 사는 궁궐에만 사용될 만큼 재질이 뛰어난 나무였다.

춘양의 금강송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일제는 제재소까지 세워 마구잡이로 베어갔다. 주재소 인부만 300명에 달했고 벌목 기간은 무려 17년에 달했다. 근대 사회로 넘어 오면서도 금강송은 엄청난 양이 벌목되었는데, 철도의 개통과 함께 춘양은 금강송 반출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여간 전부 나무였어. 역만 빠꼼하고 전부 나무가 쌓여 있었지.”

역에 쌓여있던 나무는 모두 기차에 실려 대도시로 나갔다.

“서울서 나무를 내리는데 사람들이 물어. 어디서 왔냐고. 춘양서 왔다 그러면 춘양목이네 그래. 적송이라고 하고 금강송이라고도 하지만 춘양목으로 통했어. 춘양에서 왔다고 하면 단번에 믿고 거래가 될 정도였지.”

“여 춘양목이 워낙 유명하니까 아무 나무나 가지고 우기는 거야. 이게 춘양목이다. 그래서 ‘억지춘양’이다 그런 말이 나왔지.”

또 다른 설은 소설 춘향전에서 나왔다. 춘양과 가까운 봉화 물야면에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이몽룡의 생가 계서당이 있다. 이몽룡의 실제 이름은 계서(溪西) 성이성(1595∼1664)이다.

‘억지춘양’설은 ‘사또가 춘향으로 하여금 억지로 수청을 들게 했다’는 데서 비롯돼 춘향이 춘양으로 변음됐다는 이야기다. 이 설은 뭔가 시원찮고 억지스러운 데가 있다. 그러니 되레 ‘억지춘양’이 참으로 옳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오래된 설은 애달프면서도 일면 아름답다. 춘양면은 산세가 험하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사본을 보관했던 태백산 사고가 이곳 춘양의 각화사에 있었으니 얼마나 외진 곳이었겠는가. 이 땅으로 시집온 여인들에게 춘양은 언감생심 친정 나들이는 꿈도 꾸지 못하는 감옥 아닌 감옥이었다. 춘양에는 이런 노래가 전해진다.

‘왔네 왔네 나 여기 왔네/ 억지춘양 나 여기 왔네/ 햇밥 고기 배부르게 먹고/ 떠나려니 생각나네/ 햇밥 고기 생각나네, 울고 왔던 억지 춘양/ 떠나려 하니 생각나네’

아! 억지춘양, 그녀들에게는 정말 억지로 끌려온 춘양이었을 법도 하다. 외진 땅, 이것이야말로 ‘억지춘양’의 본류가 아닐까. 귀한 나무를 자라게 하고 철로를 바꾸게 한 것도 바로 이 외진 땅이었으니. 춘양 사람은 이 모든 설이 전부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꼭 말미에 추임새마냥 이 말을 덧붙인다.

“어쨌거나 철로가 일로 안 왔으면 춘양목도 탄생하지 않았을 기고,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발전할 기틀이 안 됐겠지.”

#3 사내들의 목도 소리 울리던 그때
춘양역의 최전성기

“겨울에는 쭉쭉 뻗은 소나무를 삼판(벌목)해가꼬 눈에다 굴려. 산 아래로 굴리면 트럭에 싣고 춘양역에 가는 거야. 나무를 가득 싣고 춘양역을 향하던 그 지무시(GMC 트럭) 행렬이 기억에 선해.”

“지무시가 오면 나무 한차 띠는데 그때 돈으로 500원이라. 나무 내리는 거. 그거는 목도꾼 혼자서도 해. 굴리가 내리면 되니까. 혼자서 열 몇 차 띤 적도 있어. 죽어나지. 거짓말 조금도 안 하고 집에 와 자는 날이 몇 없었어. 잠은 역에서 잤지. 역에서 자면 빈대하고 벼룩이 엄청 많았어. 맨날 뜯겼어. 그렇게 논 좀 사고 밭 좀 사고. 그래가 이젠 다리를 몬 써. 일을 마이 해가.”

트럭에서 부려진 나무들은 역사 주변으로 산더미처럼 쌓였다.

“역에 앞이고 뒤고, 저 밑에까지, 그냥 전부가 춘양목이라. 온 데가 다 나무고 역사만 빠꼼하게 보여.”

“여기다 집하를 다 몬하면 인근역에다 분산 시켜서 모아 놔. 그렇게 쌓으려면 얼마나 많은 춘양목을 벌채 했겠어.”

“동네 아들이 역에 와서 많이 놀았어. 놀게 없응께 역이 아들 놀이터라. 사람이 많으니까 기차 올 때 되면 사람구경도 하면서 마이 놀았지. 공짜로 숨어서 기차 타는 놈도 많았어.”

역으로 화차가 들어오면 역 마당에 쌓여있던 춘양목은 다시 화차에 실렸다. 넷에서 여덟의 목도꾼이 한 조가 되어 하는 공동 작업이었다.

“여기 마루보시(화물을 싣고 내리던 사람들을 ‘마루보시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일은 다 춘양 사람들이 했어. 농사도 지으면서. 매일 일했어. 몸만 안 아프면 자꾸 나가.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었지.”

“작은 거는 앞에 두이, 뒤에 두이. 큰 거는 앞에 너이, 뒤에 너이. 그래 갈고리에 걸어가꼬 조를 맞춰서 미고 올라가.”

그때 목도꾼들은 서로의 발을 맞춰가며, 서로의 리듬을 맞춰가며, 저절로 터져 나오는 소리로 노래했다. 목도꾼의 노래는 노동을 신명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우리민족의 진한 피에서 부터 솟아났을 것이다.

‘자∼ 헤여차 헤여∼ 조심해라∼ 헤여∼ 발맞촤라∼ 헤여∼’

“이런 노래에 장단을 맞추면서 자꾸 나가지. 나오는 대로 했지. 다 같이, 전부 다 같이 했지. 그러면 신이 났어. 힘이 자꾸 나지. 다친 사람은 없었어. 잘 맞춰 했으니까.”

구순을 넘긴 할아버지가 기억을 더듬어 뽑아낸 목도 소리에는 뼈 마디마디마다 화석처럼 박혀있던 사내의 기백이 일순간 터져 나왔다.

“하루 죙일 일하면 2만원이나 2만5천원 받았어.”

“철도가 여기에 첨 들어올 때부터 한 7~8년 했나. 그리고 나서 끝나뿌렀지. 오래 몬했어. 그 이후에는 다 철수 해버렸어. 일 잠깐 하고 끝났지.”

“이제 목도 소리(노래)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다 죽어버렸어. 아는 사람도 다 잊어버렸고.”

그 시간은 10년이 채 못 되었지만, 춘양역에 춘양목이 미어터지게 쌓여 있었던 그때, 열차에 가득 실린 춘양목이 끝없이 도시로 향했던 그때, 춘양 사내들의 목도 소리가 쩌렁쩌렁 신나게 울렸던 그때가 바로 춘양역의 최전성기였다.

#4 호시절은 지났지만
춘양역의 시간은 여전히 이어져

수많은 목상과 수많은 목도와 수많은 장꾼, 그리고 외지에서 들고 나던 수많은 사람이 반드시 거쳐 갔던 춘양역의 역전통에는 식당과 선술집, 여인숙이 빼곡했다. 그들은 춘양의 호시절을 함께 맞이했고 또한 함께 배웅했다. 지금 역전통은 샘처럼 고요하고 ‘역전 실비식당’ ‘태양다방’ ‘역전 여인숙’과 같은 간판이 빛바랜 얼굴로 걸려 있다.

역 마당의 들입에는 몇 그루의 춘양목이 문실문실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로 서있다. 한때의 영화를 소환하는 기다림 같기도 하고, 기원하는 솟대 같기도 하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키 큰 나무들이 풍성한 이파리를 달고 시원하게 솟아 있고, 육각의 정자와 짧은 레일바이크가 그 그늘 속에 있다.

정자의 육각 지붕이 춘양역 구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 이 마당에는 춘양목이 가득 쌓여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역사는 1998년에 준공된 것이다. 역사 안이 환하다. 중앙 홀의 둥근 천창에서 무수한 빛이 쏟아진다. 장날이 되면 지금도 인근 마을에서 사람이 찾아 들고 송이철이 되면 춘양목 아래에서 자생한 송이를 맛보기 위해 도시 사람이 몰려든다.

시인 곽재구는 ‘춘양’을 노래했다. 소설가 성석제는 짧은 글 ‘춘양면 의양리의 용궁반점’을 썼다. 여행가 유성용은 ‘춘양의 앵두다방’을 기행했다. 호시절은 지났어도, 춘양역의 시간은 들고 나는 이들을 이으며 전진한다. 밝고 속 깊은 인연을 만들면서….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 기획 :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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